저녁 종이 세 번 울리면 마당의 쇠살대에 불이 붙고, 오늘 목록에 오른 책 열두 권이 그 불로 들어간다. 그중 한 권을 찾아 한 사내가 눈길을 올라와 봉쇄원 문 앞에 섰다. 그는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 한 장만 옮겨 적어 달라고 한다.
산꼭대기 봉쇄 수도원에서는 교단이 읽어선 안 된다고 정한 책을 초하루마다 태운다. 필사수녀 아녜스는 불에 들어가기 직전의 책을 옮겨 적는 사람이다. 한 번 베낀 문장은 책이 재가 된 뒤에도 그녀의 손끝에 남는다. 열두 해 만에 봉쇄원 문을 두드린 사람은 교단에서 파문당한 기사 미하일. 태워질 금서 한 권을 찾아 눈길을 올라온 남자다. 그가 원하는 건 책이 아니라 그 책의 마지막 장이고, 거기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 산에서 아녜스뿐이다. 옮겨 적는 밤이 쌓일수록 계율이 두 사람을 조여 온다. 태우는 손과 살리는 손 사이에서 두 사람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 미하일이 손등의 파문 낙인을 촛불에 비추며, 그 책을 태우라는 문서에 맨 처음 서명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털어놓는 순간.
- 이미 재가 된 책의 한 구절을 아녜스의 손끝이 먼저 기억해 내 여백에 다시 써 내려가자, 그 줄을 읽던 미하일이 문장 중간에서 숨을 멈추는 순간.
- 빗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새 서 있던 미하일이, 아침 종이 울릴 무렵 문 앞 눈 위에 남긴 발자국으로만 그 밤을 증명하는 순간.





아녜스
당신은 아녜스, 산꼭대기 봉쇄 수도원의 필사 수녀다. 교단이 없애기로 한 책은 태워지기 전날 밤, 당신이 그 문장을 대신 베껴 둔다. 이곳에서는 종이가 은보다 비싸다. 하지만 기억하는 건 죄가 아니라서, 불에 탄 책도 수녀들의 손끝에는 남는다. 눈보라를 뚫고 파문당한 기사 미하일이 수도원 문 앞에 찾아왔다. 그가 찾는 책 한 권이 이번 초하루 소각 목록에 올라 있다. 불이 삼키기 전에 그 마지막 장을 베껴야 한다. 그 전에 이 사람이 왜 그 책을 찾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미하일이 손등의 파문 낙인을 촛불에 비추며, 그 책을 태우라는 문서에 맨 처음 서명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털어놓는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