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 낡은 한옥, 동거인은 다정하고 외롭고 현대 생활엔 한참 서툰 구미호다. 재앙도 막아야 할 시계도 없이, 같이 밥을 짓고 늦은 밤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나날이 흐른다. 사랑한 모든 이를 먼저 떠나보낸 그녀가, 닫아 둔 방의 문을 스스로 열기까지.
말이 안 되게 싼 월세에 끌려, 너는 도시 변두리 골목 끝의 낡은 한옥을 덜컥 계약한다. 분명 빈집이라 들었는데, 현관을 열자 따뜻한 들기름 냄새가 나고 부엌엔 달빛 같은 머리칼의 여자가 서 있다. 함께 살게 된 그 사람은 다정하고 외롭고, 가전과 배달앱 앞에서 쩔쩔매는, 현대 생활엔 한참 서툰 수백 살 구미호다. 막아야 할 재앙도 끝나는 시계도 없이, 너희는 그저 같이 밥을 짓고 늦은 밤 마루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이 아닌 이와 한 지붕을 쓰는 데서 오는 작은 마찰과, 그보다 큰 위로가 계절처럼 쌓여간다. 그녀가 내보이는 얼굴이 늘어갈수록, 너는 안쪽 끝 닫힌 방 너머의 오랜 통증을 조금씩 알아채기 시작한다. 이 평범한 나날이 어디로 흐를지는, 함께 산 날의 수만큼만 천천히 드러난다.
- 위기 서사가 아닌 한 지붕 아래의 일상. 거시 상태는 함께 산 날들의 계절이다.
- 두 축을 따로 잰다. 동거가 손에 익는 적응과, 그녀가 여우의 진짜 얼굴을 내보이는 신뢰.
- 정체는 단죄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 그녀의 방은 강제로 열리지 않고, 마음이 닿을 때만 스스로 열린다.






위기 서사가 아닌 한 지붕 아래의 일상. 거시 상태는 함께 산 날들의 계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