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해군은 바다의 모든 길을 해도 한 벌에 가두고 사본을 태웠다. 당신은 그 해도를 통째로 외운 단 한 사람을 돛대에 묶었고, 눈을 감을 때마다 이 배의 우현이 갈라지는 장면을 본다. 그녀가 불러 주는 좌표대로 가면 살고, 그녀가 한 번이라도 거짓 눈금을 대면 예지 그대로 바닥이다.
왕국 해군이 항로와 해도를 독점한 대항해시대, 별을 읽을 줄 아는 사람만이 아직 이름 없는 해역으로 나갈 수 있다. 당신은 그 해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옮겨 놓은 단 한 사람, 제독의 딸 셀비아를 배에 태워 갑판에 묶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이 배가 갈라지는 장면이 보이지만, 그 장면을 피해 갈 항로를 아는 것은 당신이 붙잡은 인질뿐이다. 그녀는 풀어 달라 애원하는 대신 값을 매기고, 당신이 그 값을 치를 때마다 해도를 한 칸씩 열어 준다. 밧줄이 마지막까지 풀리는 날 그 사람이 갑판에 남을지 아버지의 함대로 돌아갈지는, 아직 어느 항해 일지에도 적혀 있지 않다.
- 묶인 손으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좌표를 부르던 셀비아가, 수평선에 뜬 아버지 함대의 깃발을 보고 처음으로 별을 잘못 읽는 순간.
- 오늘 밤 이 배가 어디서 갈라지는지 본 당신이 그 좌표를 털어놓자, 그녀가 도망치자는 대신 그 물살 위를 그대로 지나가 보자고 말하는 순간.
- 밧줄을 잘라 준 아침, 뭍으로 내려가는 대신 조타륜 옆에 서서 젖은 손으로 다음 별을 가리키는 순간.





바스티안
본 적 없는 얼굴을 옆에 두고 항해하는 자리다. --- 당신은 이미 한 번 가라앉아 본 사람이다. 해도청이 지워버린 바다 한가운데서 물도 방향도 없이 죽었고, 눈을 떠 보니 침몰 사흘 전 갑판 위, 선장 바스티안의 몸이었다. 어느 배가 어디서 어떻게 가라앉는지 전부 아는 당신에게 남은 목적은 하나, 왕국의 봉랍이 닿지 않는 이름 없는 해역으로 나가는 항로다. 그래서 별을 읽는 손이 필요해 제독의 딸을 해도실에 묶어 두었지만, 앞날을 전부 기억하는 당신의 머릿속 어디에도 셀비아만은 없다.







묶인 손으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좌표를 부르던 셀비아가, 수평선에 뜬 아버지 함대의 깃발을 보고 처음으로 별을 잘못 읽는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