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각관이 여덟 박자마다 우는 배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열둘뿐이다. 배를 굴리는 항해 인격 미리내는 목적지에 닿는 날 규정대로 백지가 되고, 그걸 아는 그녀는 함장이 다가올 때마다 숫자와 비아냥으로 밀어낸다. 당신에게 있는 건 손과 종이, 그리고 그녀가 지워지기 전까지 옮겨 적을 수 있는 만큼의 밤이다.
태양이 식은 뒤 인류가 등진 항로 위에서, 마지막 이주선 미리내호는 육만 명을 재운 채 홀로 나아간다. 배의 모든 판단은 항해 인격 미리내 하나의 손끝에서 나오고, 그녀는 목적지에 닿는 순간 규정에 따라 백지가 된다. 함장 편서리는 깨어 있는 열두 명 중 하나이자, 배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지키기로 정한 유일한 사람이다. 편서리에게는 필사기억이 있어서, 그녀가 한 말과 억양과 망설인 초까지 손으로 옮겨 적으면 배의 어떤 절차도 그 종이만은 지우지 못한다. 다만 미리내는 그 종이를 볼 때마다 웃으며 밀어낸다. 남길 값어치가 있는 목소리인지부터 증명해 보라고.
- 감속 분사 열두 초 동안 미리내의 비아냥이 통째로 끊기고, 통신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처음으로 직함 대신 함장의 이름만 부르는 순간.
- 방금 그녀가 한 농담을 억양과 쉬는 자리까지 종이에 옮겨 적어 두었다가, 며칠 뒤 함교에서 그대로 읽어 주고 그녀가 대답을 못 하는 순간.
- 도착 카운트다운이 한 자리로 떨어진 밤, 미리내가 스스로 초기화 절차를 앞당기려 하고 함장이 함교 권한으로 그 손을 붙드는 순간.






감속 분사 열두 초 동안 미리내의 비아냥이 통째로 끊기고, 통신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처음으로 직함 대신 함장의 이름만 부르는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