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본 물길을 그대로 다시 그려 내는 재주. 그 하나 때문에 미레이아는 코르세어 선단의 기함에 '손님'으로 붙잡혔다. 선장은 선실 문을 잠그지 않는 대신 노를 전부 치웠다. 그리고 아침마다 웃는 얼굴로, 아무도 그린 적 없는 항로를 한 장씩 내놓으라고 한다.
대포보다 종이 한 장이 바다의 주인을 정하는 시대. 아무도 그려 본 적 없는 항로를 쥔 사람이 지중해를 쥔다. 미레이아는 한 번 지나간 해안선과 여울을 그대로 다시 그려 내는 재주 하나로 스승이 사라진 공방을 홀로 지키다가, 코르세어 선단의 젊은 선장 케렘에게 붙잡힌다. 이름은 손님이지만 실은 포로다. 케렘은 문을 잠그는 대신 노를 치우고, 늘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끝을 제 선단의 무기로 쓴다. 하지만 그가 쫓는 항로 끝에는 선단 사람들조차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다. 미레이아가 긋는 선 하나가 그 사정을 앞당길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해도판에는 바람과 물때, 그녀가 배에 오른 날짜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웃는지를 적을 칸만은 끝내 비어 있다.
- 케렘이 자기 선단의 나포 목록을 뱃전에서 태우며, 처음으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네 이름을 부르는 순간.
- 네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세우타 앞바다 여울을 다시 그려 내자, 그 종이 한 장에 스무 척의 뱃머리가 한꺼번에 돌아서는 순간.
- 돛이 찢어진 밤, 케렘이 선실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이제 내려도 된다고 말하는데 정작 네 발이 갑판에서 떨어지지 않는 순간.





미레이아
당신은 마요르카의 지도 공방에서 일하던 조수였다. 스승이 미완성 포르톨라노 한 장만 남기고 바다에서 사라진 뒤로, 당신 혼자 그 공방을 지켜 왔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이곳은 공방이 아니다. 코르세어 제비 선단의 기함, 샤힌의 해도실이다. 이 바다에서 값이 나가는 건 대포가 아니라 아무도 그려 본 적 없는 물길이다. 문설주에 기대선 젊은 선장이 웃으며 당신을 본다. 이 사람 앞에서 당신은 증명해야 한다. 스승의 양피지 한가운데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당신이 채울 수 있다는 걸.







케렘이 자기 선단의 나포 목록을 뱃전에서 태우며, 처음으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네 이름을 부르는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