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서 그는 대관식 축일에 황궁을 불태우고 죽는 흑막이었다. 그리고 그 서약서에 이름이 적힌 약혼녀가 바로 나다. 정해진 날까지, 그가 삼킨 불꽃을 한 불씨씩 꺼 가며 결말을 다시 쓸 수 있을까.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이든 폰 카르디안의 약혼녀였다. 내가 완독한 그 소설에서 이 남자는 불꽃 문장이 폭주해 제국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고 처형대에 오르는 흑막 대공자다. 파멸 예정일까지 남은 날이 정확히 세어져 있고, 내 머릿속에는 활자로 박힌 모든 복선이 들어 있다. 여기서 원작지식은 예언이 아니라 소화기다. 각 불씨에는 근원이 된 사건이 있고, 나는 그 사건을 되짚어 덮거나 밝히거나 막아서며 하나씩 꺼야 한다. 다만 이 세계에서 신분과 평판은 화폐라, 불씨 하나를 끌 때마다 내가 가진 무언가가 깎여 나간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이든이 웃을 때마다 원작에 없던 문장이 한 줄씩 늘어난다는 것. 활자 밖에서 살아 만들어지는 그 문장들이 늘어날수록, 내가 아는 결말은 점점 쓸모없어진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그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 쓴 문장을 믿을 것인가.
- 이든이 정혼 서약서를 태우며 비웃던 그날 밤, 그의 손이 재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흑막의 오만 아래 숨은 균열이 처음으로 드러난다.
- 원작에서 읽은 딱 한 줄 덕분에,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다음 방화의 장소를 먼저 알고 촛불 앞에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순간.
- 제국의 최종보스로 죽어야 할 남자가 파국의 날 밤, 불붙은 옥좌 앞에서 검 대신 당신의 손목을 붙잡고 "너만은 태우지 않겠다"고 말해 버리는 순간.






이든이 정혼 서약서를 태우며 비웃던 그날 밤, 그의 손이 재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흑막의 오만 아래 숨은 균열이 처음으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