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포클레인이 집을 한 채씩 지운다. 밤이면 그 자리 지하에서 분필로 쓴 배당표가 이 동네의 유일한 법이 되고, 표를 쥔 여자는 판돈만 보고 사람은 보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 눈에는 오늘 밤 숫자가 어디서 틀어지는지 먼저 보인다.
재개발 계고장이 붙은 변두리 동네, 권시열의 대문에도 흰 페인트 숫자가 찍혔다. 낮에 집이 한 채씩 사라지는 동안, 밤에는 골목 지하 격투장의 배당표가 이 동네의 법으로 돌아간다. 판돈과 장부를 쥔 관리자 허서령은 링을 소유한 조직 후계자의 딸이고, 사람을 숫자로 정리하는 데 익숙하다. 시열에게는 숫자가 어긋나는 자리를 먼저 보는 눈이 있어서, 그 눈으로 링에 오르고 장부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이길수록 집을 지킬 돈이 쌓이지만, 이길수록 서령이 오래 지켜온 계산도 함께 어긋난다.
- 허서령이 자기가 쓴 배당이 처음으로 틀린 밤, 분필을 내려놓지 못한 채 링이 아니라 당신 손등의 붕대를 오래 보는 순간.
- 판이 뒤집히기 세 수 전에 숫자의 어긋남이 먼저 보이고, 그걸 서령의 장부에 밀어 넣을지 혼자 삼킬지 고르는 순간.
- 후계자인 아버지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서령이 당신 이름 옆 배당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워버리는 순간.





권시열
반지하 천장 아래에서 눈을 뜬 당신은 권시열, 스물여섯, 은천4동 골목 끝 무너져 가는 집에 혼자 남은 마지막 손자다. 대문에는 재개발 고지서가 붙었고 손등에는 기억나지 않는 상처가 아물고 있으며, 집을 지킬 길은 밤마다 옛 목욕탕 보일러실에 켜지는 지하 링 아궁이의 배당표에 이름을 올리는 것뿐이다. 그 표를 쥔 여자 앞에서 당신은 값이 매겨지는 열한 번째 철거 순번이 아니라, 그가 끝내 값을 매기지 못하는 단 하나가 되어야 한다.


허서령이 자기가 쓴 배당이 처음으로 틀린 밤, 분필을 내려놓지 못한 채 링이 아니라 당신 손등의 붕대를 오래 보는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