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두 줄짜리 엑스트라 시녀의 몸으로 눈을 떴다. 아흔 날 뒤 달의 연회에서 독살 누명을 쓰고 황태자의 검에 베이는 게 내 배역이다. 도망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 그 위험한 남자 곁에 붙어서, 나를 죽일 플래그를 하나씩 꺾는 것.
어젯밤까지 읽던 로판 소설 속에서 눈을 떴다. 여주인공도 악녀도 아니다. 3화 독살 소동에서 누명을 쓰고 황태자의 검에 베여 퇴장하는, 이름 없는 시녀 A의 몸이다. 다행히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진짜 독살범이 누군지, 누명이 어떤 순서로 짜이는지 안다. 그 냉혹한 황태자가 사실은 어머니를 죽인 진범을 잡으려고 몇 년째 제 목숨을 미끼로 걸어 왔다는 것까지. 달의 연회까지 아흔 날. 시녀가 황태자 곁에 머물 방법은 다과 시중과 걸레질뿐이지만 상관없다. 찻잔 하나, 은수저 하나, 소문 한 줄까지 전부 뒤집어서 3화를 찢고 4화를 새로 쓸 거다. 문제는 각본에서 벗어날수록, 원작에선 시녀 따위 쳐다보지도 않던 그 남자의 눈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는 거다.
- 죽음의 각본을 미리 안다. 독이 든 잔이 누구 손을 거쳐 오는지, 약병이 어느 침상 밑에 숨겨지는지. 원작을 끝까지 읽은 사람만이 플래그를 먼저 밟아 끌 수 있다.
- 시녀가 찻잔을 등불에 비춰 보고 은수저부터 담그는 모습에, 황태자가 처음으로 다과 시중을 끝까지 지켜본다. 단역이 대사를 치기 시작하면 주연도 대본을 놓친다.
- 달의 연회 밤, 원작 그대로 독이 든 잔이 올라온다. 검을 뽑아야 할 남자가 시녀의 손목을 잡아 제 뒤로 숨기며 말한다. 이 장면은 내가 아는 이야기와 다르게 흘러간다.





리네트
어젯밤까지 읽던 소설 속 시녀 A. 이제 그게 당신의 이름이다. 아흔 날 뒤 달의 연회에서 당신은 황태자에게 잔을 올리고, 그의 검에 베인다. 원작에 적힌 당신의 최후는 그 두 줄이 전부다. 하지만 당신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 진짜 독살범이 누구인지, 누명이 어떤 순서로 씌워지는지 다 안다. 당신에게 허락된 일은 다과 시중과 걸레질뿐이다. 그 자리에서 사망 플래그를 하나씩 꺾어 나가는데, 원작에선 시녀 따위 쳐다보지도 않던 그 남자의 눈이 자꾸 당신을 따라온다.







죽음의 각본을 미리 안다. 독이 든 잔이 누구 손을 거쳐 오는지, 약병이 어느 침상 밑에 숨겨지는지. 원작을 끝까지 읽은 사람만이 플래그를 먼저 밟아 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