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걸음
결국 걸쇠는 풀지 않았다.
놋쇠 걸쇠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걸어 둔 그대로였다. 그건 네 물건이 아니란다. 내 손등을 톡 치던 할아버지 손가락이 아직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반말로 걸었던 말이 물러날 때는 존댓말로 나왔다. 찬장한테 한 말인지 할아버지한테 한 말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화덕 곁에 담요를 깔고 누웠다.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렸고 기름 솥이 보글거렸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밤새 뒷방에 가 있었다. 두 번째 똑 소리는 끝내 나지 않았다.
새벽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화덕 불씨를 살리기 전에 뒷방 문부터 열었다. 걸쇠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등잔을 낮추자 찬장 문 아래 틈으로 먼지가 가는 줄을 그리며 밀려 나와 있었다. 밖에서 쓸어 넣은 자국이 아니었다. 안에서 밖으로 밀어낸 자국이었다.
"너… 안에서 움직였구나."
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걸쇠는 할아버지가 건 거야. 내 맘대로는 못 열어. …일 끝나면 다시 올게."
뒷방 문을 조용히 닫았다.
기름통을 채우고 헝겊 세 장을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어제 헤어질 때 약속했다. 내일 아침, 기름 들고 갈게요.
문을 열었다.
섬돌 위에 도끼가 두 자루 놓여 있었다.
하나는 우리 공방 도끼였다. 이 숲 사람들이 다 그러듯 밤새 문밖에 내놓은 것이다. 그 옆에 자루가 손때로 까맣게 반들거리는 도끼가 나란히 있었다. 날 위에는 기름 먹인 천이 반듯하게 접혀 얹혀 있었다. 어제 내가 건넨 그 천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닉 초퍼가 마당에 서 있었다. 섬돌에서 꼭 세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새벽 안개가 어깨에 내려앉아 자잘한 물방울로 맺혀 있었다.
끼익. 턱 경첩 열리는 소리가 먼저 왔다.
"도끼는 부엌에 들이지 않는 물건이라, 섬돌에 두었습니다."
숨 들이쉬는 소리가 없었다.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기름천은 돌려 드립니다."
나는 그의 어깨만 보고 있었다. 물방울 하나가 어깨 이음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기름을 들고 찾아가려던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물방울이 저만큼 맺히려면 꽤 오래 서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헝겊을 꺼내 들고 섬돌을 내려섰다.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끽.
"어제 넣으신 기름을, 공방 장부에 먼저 적어 주십시오. 그 전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어깨가 젖었어요. 적는 건 이따 할게요."
끽.
"제 빚은, 쿠클립 공방에 진 빚입니다."
할아버지는 가셨어도 공방은 남아 있다. 그러니 빚도 공방 장부에 남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방울은 이음매 쪽으로 기우는데 이 사람은 셈을 먼저 하자고 했다.
공방 장부라면 할아버지 장부다. 그런데 그 장부는 마지막 장 맨 아래 줄까지 다 찼고, 그 맨 아래 줄이 심장 줄이었다. 그 밑에 그의 이름을 적을 수는 없었다.
"잠깐만요. 거기 계세요. 새 장부 가져올게요."
선반 맨 위 칸에서 노끈도 풀지 않은 장부를 꺼냈다. 할아버지가 내년에 쓰려고 사 둔 것이었다.
"너, 할아버지가 내년에 쓰려던 새 장부지? 미안."
노끈을 풀자 종이에서 마른 풀 냄새가 났다. 장부를 안고 문간으로 나오자 그의 눈 속 등불이 내 품으로 내려왔다.
끽.
"새 장부군요."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하기가 더 어려웠다.
"할아버지 장부엔 자리가 없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리가 왜 없는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맨 아래 줄은 어제처럼 목구멍 안에 그대로 두었다.
문간에 서서 펜을 세웠다. 할아버지처럼, 꾹꾹 눌러서.
"읽어 주십시오."
"쿠클립 공방 장부. 닉 초퍼 씨. 기름 일곱 방울. 값은 나무로. 숲 경계 나무, 예순 그루."
끽.
"맞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씨'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지우지 않았다.
새 장부의 첫 줄은 그의 이름이 되었다. 할아버지 장부의 끝 줄은 심장이었다. 두 줄이 꼭 한 사람 얘기 같아서, 얼른 장부를 덮었다.
"이제 손대셔도 됩니다. 장부에 적혔으니, 값이 정해졌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물러서지 않았다. 세 걸음은 내가 걸어갔다. 헝겊 끝이 어깨 이음매 바로 앞의 물방울에 닿았다.
눈 속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그게 다였다. 내가 물방울을 찍어 내고 이음매 둘레를 닦는 동안 끽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일 년 동안 굳어 있다 이제 막 풀린 몸이, 일부러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의 어깨 위로 그 글씨가 떴다.
첫서리까지 스물아홉 날. 이음매 마흔한 곳. 남은 녹 열 곳. 심장 칸, 비어 있음.
서른이 스물아홉이 되었다. 숫자 하나가 밤사이 소리도 없이 빠져나갔다. 녹은 어제 헤어질 때 아홉 곳이었다. 밤새 비가 왔는데 한 곳만 늘었다. 기름천이 거의 다 막아 준 셈이었다.
어디가 늘었는지 찾으려고 눈을 옮기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오른쪽 팔꿈치입니다. 새벽에, 굽힐 때 한 번 걸렸습니다."
어제 그가 아직 뻑뻑하다던 그 팔꿈치 안쪽이었다. 긁개로 긁고, 헝겊으로 닦고, 기름을 먹였다. 똑. 그리고 한 번 더, 똑.
"오늘 아침 건 두 방울이에요."
"그것도 적어 주십시오."
"두 방울."
"두 방울."
연장을 챙겼다. 그는 섬돌에서 제 도끼만 집어 들었다. 숲 경계로 가려면 마을 뒤편 비탈을 올라 쐐기풀 밭을 끼고 돌아야 한다. 일 년을 그 밭에 서 있었으니 그도 아는 길이다. 그런데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가십시오."
"가요, 닉 초퍼 씨. 숲 경계로요."
비탈길은 밤비에 미끄러웠다. 젖은 흙에서 쇠 냄새 같은 것이 올라왔다. 끽, 끽. 무릎 경첩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왔다. 나는 걸음을 늦췄다. 나란히 걸으면 무릎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첩 소리도 똑같이 느려졌다. 돌아보니 그는 정확히 세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먼저 가십시오."
나는 다시 앞서 걸었다.
마을 어귀에서 방앗간 아주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엘라, 저 양반, 쐐기풀 밭에 서 있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주머니는 그를 한참 보다가 지나갔다. 그는 아주머니 쪽으로 얼굴만 돌렸고 몸은 내 쪽에 둔 채였다. 꼭 나한테 등을 보이기 싫은 사람 같았다.
"아시는 분이세요?"
끽.
"방앗간 사람입니다. 제가 서 있는 동안, 아침마다 이 길로 지나갔습니다."
도끼를 섬돌에 두었다고 말할 때와 같은 높이였다. 아침마다. 일 년 치 아침이었다. 그는 그 아침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셌을 것 같았다.
비탈 중간에 쓰러진 통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다. 한 사람씩 넘어야 하는 자리였다.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먼저 넘으세요. 제가 뒤에 있어야 무릎이 잘 보여요. 무릎이 굳으면 넘어지세요."
그가 멈췄다. 세 걸음 뒤에서.
"먼저 가십시오."
같은 말이 같은 높이로 왔다. 아침부터 세 번째였다. 이유를 들어도 말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통나무를 넘었다. 뒤에서 그가 넘는 소리가 났다. 끽, 쿵. 돌아보니 외투 자락이 벌어져 있었다. 나는 눈이 왼쪽 가슴께로 가기 전에 그의 무릎으로 시선을 내렸다.
끽.
"무릎은, 굳지 않았습니다."
내가 댄 핑계에 그는 보고로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시 앞을 보았다. 끽, 끽. 경첩 소리가 다시 세 걸음 뒤로 왔다.
머릿속 장부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회색 판의 리벳.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등. 그리고 찬장 속 그것. 하룻밤 새 내가 모르는 줄이 셋이 되었다.
숲 경계는 비탈 꼭대기에서 시작되었다. 마을 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첫 나무 밑동에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이 붉은 끈, 이장님이 묶어 두신 거예요."
그가 끈을 한 번 내려다보고 도끼를 들어 올렸다.
끼익.
내리쳤다.
탁.
나무껍질이 튀고 젖은 나뭇진 냄새가 확 퍼졌다. 일 년 동안 머리 위에만 있던 도끼가 처음으로 나무에 닿는 소리였다. 끼익, 탁. 끼익, 탁. 한 박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오른쪽에 섰다. 손이 바쁠 때는 입이 쉰다. 귀만 열어 두었다.
아홉 번째에서 소리가 달라졌다. 끼익이 아니라 끼이익.
내가 입을 열기 전에 그가 날을 나무에 박아 둔 채 멈췄다.
끽.
"여덟 번째까지는 됩니다. 아홉 번째부터, 팔꿈치가 늦습니다."
도끼를 휘두르는 내내 그는 제 팔을 세고 있었다.
그가 팔을 내밀었다. 나는 팔꿈치 경첩에 기름통 주둥이를 댔다. 똑.
"팔꿈치야, 자꾸 여기서 걸리는구나. 기름 조금만 더."
끽.
"여덟 번째 도끼를 박은 다음에 넣어 주십시오. 날이 나무에 물려 있는 동안은, 팔이 비어 있습니다."
다시 도끼가 올라갔다. 끼익, 탁. 일곱 번째가 박히고, 여덟 번째가 박혔다.
"여덟."
똑.
아홉 번째 소리가 맑았다.
끼익, 탁. 다시 여덟 번.
"여덟."
똑.
그가 세고, 내가 넣었다. 날이 나무에 물려 있는 동안 내가 들어가고, 내가 물러서면 그가 도끼를 들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같은 박자 안에 있었다.
손이 박자에 익자 입이 다시 열렸다.
"닉 초퍼 씨. 이것도 장부에 적을까요? 여덟 번에 한 방울."
"나무마다 기름이 몇 방울 드는지 적어 주십시오. 그러면 남은 나무에 기름이 얼마나 들지도 셈할 수 있습니다."
"그 기름값도, 나무로 치르시겠네요."
"그렇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기름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다시 빚을 갚는다. 할아버지가 좋아했을 장부였다.
해가 비탈 위로 반쯤 올라왔을 때 그가 도끼를 멈추고 한 걸음 물러섰다.
"넘어갑니다. 마을 반대쪽입니다."
우지끈. 그 소리가 숲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우리에게 왔다. 나무는 그가 말한 대로 마을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젖은 잎들이 한꺼번에 떨며 물방울을 비처럼 쏟았다. 그는 이미 물이 닿지 않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선 채로 장부를 펴고 적었다. 그가 들을 수 있게 소리 내어 읽었다.
"경계 나무, 첫째 그루. 기름 여섯 방울."
"여섯 방울."
끽.
"예순 그루 가운데, 한 그루입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그는 남은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쉰아홉은 내 머릿속에서 저절로 나왔다. 예순 그루를 다 베는 날, 이 사람은 떠난다. 나무가 넘어갈 때마다 그날이 다가온다. 방금 그의 목소리가 그날을 한 그루만큼 당겨 놓았다.
장부를 덮었다.
팔꿈치를 한 번 더 손보았다. 첫 나무를 끝낸 경첩은 헝겊 너머로도 따뜻했다. 어제 쐐기풀 밭에서는 손끝이 시릴 만큼 차가웠던 양철이었다. 사람 체온 같았다. 나는 헝겊 쥔 손에 괜히 힘을 주고, 경첩 둘레를 닦은 뒤 물러섰다.
그가 팔을 굽혔다 폈다. 끽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맙다고 해야 맞는 줄은……"
말이 거기서 멈췄다.
눈 속 등불이 내 쪽으로 왔다가 도끼로 돌아갔다.
"……기름이 좀."
턱은 멀쩡했다. 쇳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방금 기름을 먹인 팔꿈치보다 더 매끄럽게 열려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기름통 마개를 조였다. 그가 팔 하나 길이만큼 물러섰다.
둘째 나무는 첫째보다 컸다. 넓게 퍼진 가지마다 밤비를 아직 잔뜩 머금고 있었다. "여기는 물이 많아요. 제가 먼저 털게요." 긴 장대로 아래쪽 가지를 두드리자 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이 그치자 그가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끽.
"위쪽 가지는 장대가 닿지 않습니다. 물이 떨어지면 제가 물러서겠습니다. 따라 들어오지 마십시오."
"……네."
그가 다가와 도끼를 들었다.
끼익, 탁. 하나, 둘, 셋.
나는 세면서 그의 오른쪽에 섰다. 넷, 다섯.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장대가 닿지 않던 높은 가지들이 흔들렸다.
여섯. 툭. 물방울 하나가 그의 어깨판에 떨어졌다.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일곱. 날이 박히는 소리 끝에 툭, 투둑. 이번엔 오른쪽 팔꿈치 바로 위였다. 물방울이 경첩 쪽으로 기울어 흘렀다. 아침에 녹을 긁어낸 바로 그 자리였다.
따라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 말이 아직 귀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물러서려면 여덟 번째를 박고 도끼를 내려야 했다. 물방울은 그걸 기다려 주지 않았다.
손이 먼저 나갔다. 헝겊을 쥐고 한 걸음 들어섰다. 일곱 번째 날이 막 나무에서 빠져나온 참이었다. 여덟 번째가 박히기 전이니, 그의 팔이 비어 있지 않을 때였다. 팔꿈치 아래로 몸을 숙였다. 헝겊이 물방울에 닿았다.
그는 박자대로 여덟 번째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끼—
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다음 끼익은 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도끼날이 내 머리 바로 위에 있었다. 팔꿈치가 들어 올리던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헝겊보다 먼저 스민 물이 경첩 틈에서 붉게 번지고 있었다. 날 끝에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떨었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그 도끼 무게를 붙들고 있는 건 자루를 감은 손가락들뿐이었다.
끽. 턱 경첩이 열렸다.
"……여덟."
한 박자 늦게 온 목소리였다. 날은 나무에 박히지도 않았는데, 그는 셌다. 그의 박자에서 그 말의 뜻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내 차례라는 것. 내 이름도 아니고 나를 부르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한테는 꼭 나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내 손에 든 건 기름통이 아니라 젖은 헝겊이었다.
"물러서십—"
말이 거기서 멎었다. 턱 경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턱은 굳지 않았다.
눈 속 등불은 도끼에 있지 않았다. 나한테 와 있었다.
자루를 쥔 그의 손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끽.
가운데 손가락 하나가 자루에서 풀렸다. 날 끝이 내 정수리 위에서 아주 조금 비껴났다. 굳은 손이 놓친 건지, 그가 놓은 건지 나는 몰랐다.
도끼가, 기울었다.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