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한 방울
할아버지 장부의 맨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심장 하나. 값 없음. 만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지난가을부터 기침이 깊어지더니 봄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세 가지를 물려받았다. 쿠클립 공방 하나, 겨울 한 철 치 빚, 그리고 이 한 줄.
글씨를 보면 안다. 할아버지는 대충 적을 때면 펜을 눕혔다. 이 줄은 펜을 세워, 종이가 패일 만큼 꾹꾹 눌러 썼다. 못 만든 사람의 글씨가 아니다. 안 만들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글씨다.
누구의 심장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화덕 불씨부터 살렸다. 기름 솥은 할아버지 때부터 한 번도 불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양철장이 기름은 남한테 사는 게 아니라 제 손으로 달이는 거라고, 할아버지는 늘 그랬다. 거울은 천을 씌워 엎어 두었고, 도끼는 부엌이 아니라 문밖 섬돌 위에 내놓았다.
이 숲 집은 다 그렇다. 한 해 전, 동쪽 마녀가 하늘에서 떨어진 집에 깔려 죽었다. 마녀가 살아 있을 때, 이 숲의 도끼는 가끔 나무가 아닌 것을 베었다. 마녀가 죽던 날 저주는 반만 풀렸다. 걸려 있던 저주는 멈췄지만, 이미 잘려 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거기에 꼭 한마디를 붙였다. 이 숲에서 잘려 나간 것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도끼를 부엌에 들이지 않는다. 거울도 엎어 둔다. 왜 거울까지 엎어 두는지는 할아버지도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엘라, 있니?"
문을 두드린 건 이장님이었다. 손에 쥔 의뢰서가 아침 이슬에 눅눅했다.
"첫서리 전에 숲 경계 나무 예순 그루. 쐐기풀 밭 쪽부터 해 줘. 거긴 일 년째 아무도 안 들어갔어."
품삯은 은전으로 받지 않는다. 이 숲에선 늘 그렇다. 벤 나무는 마을의 겨울 땔감이 되고, 마을은 그만큼 할아버지 빚을 지워 준다. 의뢰서를 받아 들고 고개를 숙였다. 예순 그루를, 나 혼자, 서리 전에. 셈은 해 보지 않기로 했다.
쐐기풀 밭은 비가 막 갠 참이었다.
허리까지 자란 풀잎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우수수 떨어졌다. 툭, 투둑. 치맛자락이 금세 젖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녹슬지 않으니까.
밭 한가운데에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사람 모양을 한 양철이었다.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든 채였다. 발밑 흙이 발 모양대로 깊게 눌려 있었다. 하루 이틀 서 있던 자국이 아니었다. 무릎 이음매, 손목, 목덜미까지 붉은 녹이 피어 있었다. 걸친 외투는 비에 젖고 마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빛이 다 바랬다.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반듯한 양철 얼굴이었다. 눈꺼풀이 있고, 눈썹 모양의 얇은 판이 있고, 눈 속에 작은 등불 자리가 있었다. 양철 사람한테 눈꺼풀은 없어도 되는 부품이다. 눈썹판은 더 그렇다. 누군가 공을 들여 달아 준 얼굴이었다. 등불은 꺼져 있었다.
그리고 눈가 이음매에 물방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숨을 멈추고 그 방울을 보았다. 이 숲 양철장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있다. 물이든 눈물이든 강물이든, 양철에 닿으면 전부 녹이 된다. 이음매에 스미면 관절이 하나씩 굳고, 턱까지 굳으면 입이 닫힌다. 할아버지는 그걸 한마디로 가르쳤다. 양철은 울면 녹는다.
방울이 이음매 쪽으로 기울었다.
헝겊부터 꺼냈다. 손가락은 안 된다. 살에 밴 땀도 물이다. 헝겊 끝으로 방울을 찍어 내고, 기름통 주둥이를 눈가 경첩에 댔다.
똑.
기름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작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서 이 소리가 제일 좋다.
반대쪽 눈가에도, 똑.
눈이 먼저 움직였다.
꺼져 있던 등불이 아주 희미하게 켜졌다. 눈동자가 끽, 끽, 두 번에 나뉘어 내 쪽으로 내려왔다.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은 손가락 마디. 한 방울, 또 한 방울, 또 한 방울. 도끼 자루를 감고 있던 손가락이 하나씩 풀렸다가 다시 자루를 쥐었다. 일 년을 쥐고 있던 걸 놓을 생각은 없는 손이었다. 마지막이 턱이었다.
똑. 끼익.
"…쿠클립."
사람 목소리였다. 그런데 말하기 전에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없었다. 그 한마디를 하고 턱은 다시 굳었다.
그때 그의 어깨 위로 글자가 떴다.
고칠 몸 앞에 서면 내 눈에만 뜨는 글자다. 할아버지 장부처럼 꾹꾹 눌러 쓴 글씨로, 한 줄씩.
첫서리까지 서른 날. 이음매 마흔한 곳. 남은 녹 열두 곳. 심장 칸, 비어 있음.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멎었다. 심장 칸, 비어 있음. 누구의 심장인지는 장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는데.
그가 다시 턱을 움직였다. 겨우 벌어진 틈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눈가를… 닦아 주십시오. 젖으면, 녹—"
거기서 말이 끊겼다. 흐려지는 게 아니라, 문이 닫히듯 딱.
"알아요. 닦았어요."
턱 경첩에 기름을 한 방울 더 넣으며 말을 걸었다. 그 사람한테 말고, 경첩한테.
"너, 이름이 뭐야? 일 년 동안 고생 많았지. 여기 조금만 더."
내 버릇이다. 사람에게는 존댓말, 물건에게는 반말. 할아버지는 연장한테 이렇게 다정한 애는 처음 본다며 웃곤 했다. 사람한테 다정하기는 어렵고, 경첩한테는 쉽다. 경첩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런데 대답이 왔다. 끼익, 하고 턱이 끝까지 열렸다.
"쿠클립의 손녀군요."
손이 멈췄다.
"기름 냄새가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심장을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머릿속에서 장부가 펼쳐졌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그 줄을 천천히 읽었다. 기침이 섞인, 낮고 마른 목소리였다.
심장 하나. 값 없음. 만들지 않았다.
그 줄이 목까지 올라왔다. 나는 그걸 삼켰다. 일 년 동안 이 밭에 서 있던 사람이다. 기름 일곱 방울로 겨우 입을 연 사람이다. 그 사람이 일 년 만에 꺼낸 말에 돌려줄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엘라예요. 엘라 쿠클립." 대신 그렇게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닉 초퍼입니다."
그러고는 한 줄을 보탰다.
"아까는 경첩한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경첩은 이름이 없습니다."
웃음이 터질 뻔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틀린 걸 바로잡았을 뿐이다. 그래서 더 웃겼다.
"그럼 닉 초퍼 씨, 어깨도 볼게요."
손을 뻗자 그가 말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까지 넣으신 기름은 장부에 적어 주십시오. 한 방울도 빠짐없이."
"일곱 방울이에요."
"그렇게 적어 주십시오."
그가 물러섰다. 끽, 한 걸음. 끽, 두 걸음. 끽, 세 걸음. 굳은 무릎으로 쐐기풀을 헤치면서, 도끼는 여전히 머리 위에 든 채로.
"값이 정해지기 전에는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기름 몇 방울에 값 받는 양철장이는 없어요."
"그래도, 셈은 셈입니다."
기름통을 든 채 그를 보았다. 세 걸음 거리였다. 물러서는 내내 그는 내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값은 뭘로 치르실 건데요?"
"쇠붙이는 없습니다." 머리 위의 도끼날이 햇빛에 한 번 번쩍였다. "나무로 치르겠습니다. 첫서리 전에, 숲 경계의 나무를 전부 베겠습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눅눅한 의뢰서를 꺼내 펼쳐 보였다. 숲 경계 나무 예순 그루, 첫서리 전까지.
"그거, 제가 오늘 아침에 받은 일이에요."
그가 의뢰서를 내려다보았다. 눈 속 등불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셈이 한 줄로 끝나겠군요."
"기름은 제가 대고, 도끼는 닉 초퍼 씨가 드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값이 정해졌다. 그는 세 걸음을 다시 걸어 돌아와 어깨를 내밀었다. 나는 연장으로만 손을 댔다. 오른쪽 어깨부터였다.
어깨 이음매는 내 눈높이보다 조금 높았다. 발끝을 들고 긁개를 밀어 넣자 붉은 녹 가루가 내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이 바로 위에 있었다. 숨소리가 없으니 거리가 가늠이 안 됐다. 긁고, 헝겊으로 닦고, 기름을 먹였다.
끼익. 턱 경첩이 먼저 열렸다.
"장갑을 끼지 않으시는군요."
"네?"
"쿠클립께서는 장갑을 끼셨습니다. 손끝에, 기름이 배어 있습니다."
내려다보니 정말 그랬다. 엄지와 검지 끝이 기름에 절어 노랗게 반들거렸다. 장갑을 끼면 손끝이 무뎌져서 녹이 어디서 걸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할아버지 몰래 벗고 일했고, 할아버지가 가신 뒤로는 아예 안 꼈다. 그걸 알아본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제 어깨를 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장갑을 끼면, 녹이 어디서 걸리는지 몰라서요."
"그렇다면, 이 밭에서 제게 제일 가까운 물은 그 손끝입니다."
온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긁개를 쥔 손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러니까 헝겊을 쥐는 거예요."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헝겊을 손에 한 번 더 감아 쥐고 왼쪽 어깨로 옮겨 갔다. 끽끽대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래도 팔은 일 년 버릇대로 도끼를 머리 위에 든 채였다.
"도끼야, 이제 내려와도 돼."
도끼가 천천히 내려왔다. 끼익, 하고 팔꿈치가 펴지는 소리가 길게 났다.
"팔이, 내려왔습니다."
보고하듯 했다. 일 년 만에 팔을 내린 사람이.
왼쪽 어깨에서 가슴께로 연장을 옮기다가 손이 멈췄다.
왼쪽 가슴에 광이 나지 않는 회색 판이 하나 덧대어 있었다. 다른 판은 전부 할아버지 솜씨였다. 할아버지가 박은 리벳은 자로 잰 듯 간격이 같다. 그런데 이 판 아래 이음매만 리벳이 들쭉날쭉했다. 좁았다가 넓었다가, 하나는 비뚜름히 박혀 있었다. 서두른 손이었다. 아니면 처음 해 보는 손이거나.
내 손을 보던 그가, 내 손이 어디서 멈췄는지도 보았다.
그는 외투 자락을 끌어당겨 회색 판을 덮었다. 너무 매끄러워서, 여러 번 해 본 손짓 같았다.
"오른쪽 팔꿈치가 아직 뻑뻑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팔꿈치로 연장을 옮겼다. 묻는 대신 그 리벳 간격을 머릿속 장부에 적어 두었다.
해가 높이 올라왔을 무렵 팔꿈치가 풀렸다. 그가 말했다.
"쿠클립께 전해 주십시오. 기름값은 나무로 치르겠다고.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장을 닦던 손이 멈췄다. 그는 모른다. 일 년 동안 여기 서 있었으니까.
"할아버지는요." 헝겊을 접었다. "지난봄에 돌아가셨어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가 웃었다. 입꼬리가 반듯하게 올라갔다. 흠 하나 없이 예의 바른 웃음이었다.
"괜찮으세요?"
대답이 오지 않았다.
정확히 한 박자였다. 바람이 쐐기풀을 쓸고 가는 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저는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말했다. "일 년 동안, 이 자리에서 길 쪽을 봤습니다."
목소리는 아까와 똑같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고, 온기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눈 속 등불이 한 겹 어두워지는 걸. 눈썹판 끝이 아주 조금 아래로 처지는 걸.
말은 아무렇지 않은데 얼굴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제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할 말을 고르는 사이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약속하신 분이 안 계시면, 서리 전에 에메랄드 시로 가겠습니다. 그곳 마법사는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고 들었습니다. 이 길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어깨 위에서 그 줄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첫서리까지 서른 날.
"서리가 내리면 이음매 속 기름이 굳어요." 양철장이 말이 먼저 나왔다. "봄까지 그 자리에서 못 움직이세요. 에메랄드 시로 가는 길도 그날 닫히고요."
"압니다. 나무를 다 베고, 서리 전에 가겠습니다."
아침에는 일감의 기한이었다. 예순 그루를 베어야 하는 날짜. 이제는 다르게 읽혔다.
예순 그루를 다 베는 날이, 이 사람이 떠나는 날이다.
괜히 기름통 마개를 한 번 더 조였다.
툭.
쐐기풀 잎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투둑, 투둑. 어느새 하늘이 다시 낮아져 있었다. 비였다. 빗방울이 풀잎을 하나씩 건너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울 하나가 그의 눈가 이음매에 떨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꼭 눈물 같았다.
손이 먼저 나갔다. 양철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손끝에 먼저 닿았다. 살갗이 닿기 직전에 손을 멈췄다. 손은 안 된다. 헝겊이어야 한다. 헝겊을 쥐고 빗물이 흘러간 줄기를 따라 닦았다. 눈가에서 턱 경첩 바로 위까지.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눈 속 등불만 내 손을 따라 내려왔다.
"고맙다고 해야 맞는 줄은 압니다."
그리고 말이 멈췄다.
"…기름이 좀."
나는 기름통을 들어 올렸다. 기름이 좀, 이라고 했으니까. 그가 팔 하나 길이만큼 물러섰다. 내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였다.
기름통을 든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방금 그 말을 막은 건, 턱이 아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디서 지내시게요?"
"비 피할 데는 있습니다. 내일부터 베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기름 들고 갈게요. 이건 오늘 밤 쓰세요. 기름 먹인 천이에요."
천을 접어 팔을 끝까지 뻗었다. 그가 천의 반대쪽 끝을 잡았다. 우리 사이에 천 한 장이 팽팽하게 걸렸다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그걸 머리에 덮어썼다.
"기름천은, 내일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먼저 가십시오."
도끼를 든 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 걸음 물러설 때도 등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밭 끝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는 빗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름천을 덮어쓰고, 도끼를 쥐고, 내가 걸어온 쪽을 향해서. 빗줄기가 굵어져 그 모습이 지워질 때까지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내가 이 한 해를 어떻게 났는지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밤 공방에는 빗소리뿐이었다.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렸다. 화덕 위에서 기름 솥이 보글거렸다. 할아버지 장부는 덮어 두고, 내 일감 공책을 폈다. 그가 시킨 대로 적었다.
닉 초퍼 씨. 기름 일곱 방울. 값은 나무로.
다 쓰고 보니 '씨'가 걸렸다. 장부에 붙이는 말이 아니다. 지우지는 않았다.
빗소리를 들으며 이음매 마흔한 곳을 하나씩 꼽았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줄이 아직 눈에 남아 있었다. 남은 녹 아홉 곳. 하루에 세 곳을 걷어 낸 셈이었다.
그는 약속이라 했고, 할아버지 장부는 일부러라고 했다. 둘 중 누가 틀린 걸까. 어느 쪽이든 그 빚은 이제 내 것이었다. 지붕 위 빗소리가 굵어졌다. 이 비가 그 밭에도 내리고 있었다. 기름천은 한 장이다. 머리를 덮으면 어깨가 남는다. 그리고 왼쪽 가슴이.
똑.
몸이 먼저 굳었다. 양철장이 집에서 나는 똑 소리는 둘 중 하나다. 기름이거나, 물이거나. 그 사람 눈가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소리는 뒷방에서 났다. 천을 씌워 엎어 둔 거울과 노끈으로 묶은 장부 더미가 있는 방. 그리고 키 큰 찬장이 하나 있는 방. 할아버지는 그 찬장에 늘 놋쇠 걸쇠를 걸어 두었다. 어릴 때 열어 보려고 하면, 할아버지는 내 손등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건 네 물건이 아니란다.
빗소리는 지붕 위에서 난다. 이건 안에서 났다. 기름 소리도, 물방울 소리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나무판을 안쪽에서 한 번 두드린 소리였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두 번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 한 번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에 그의 어깨 위에서 본 줄이 떠올랐다. 심장 칸, 비어 있음.
이 숲에서 잘려 나간 것은 죽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온 말이다. 그 말이 처음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등잔을 들고 뒷방 문 앞에 섰다. 찬장의 걸쇠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걸어 둔 그대로였다.
"너, 거기…"
말이 나오다 멎었다. 사람한테는 존댓말, 물건한테는 반말. 스물두 해 동안 한 번도 헷갈려 본 적 없는 구분이었다. 오늘 아침 쐐기풀 밭에서, 양철로 된 그 사람한테 존댓말을 고를 때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왜 망설이지 않았는지는 몰랐다. 떠오르는 건 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눈썹판 끝이 아주 조금 처지던, 제 얼굴이 움직인 줄도 모르던 그 얼굴뿐이었다.
저 안에 있는 게 어느 쪽인지, 나는 몰랐다. 그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오늘 아침에 벌써 정해 버렸는데.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