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도가 틀렸잖아
포케벨은 밤새 울리지 않았다.
하치코 출구 공중전화 앞 줄이 다 빠질 때까지 나는 거기 서 있었다. 그 사람처럼 허리춤에 차고 엄지로 문질러도 봤다. 아까 우시오 앞에서는 저절로 나오던 버릇이 막상 작정하고 하니까 안 됐다. 내 엄지는 액정 위에서 갈 곳을 몰라 허둥대기만 했다. 남의 버릇은 그 사람 손에서나 멋있었다.
자정이 넘자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아마미야 루카의 집을 몰랐다. 하니비 애들한테 "우리 집 어디야?" 하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길은 곤도 할아버지 가게에서 여기까지 오는 한 줄뿐이었다.
그래서 왔던 길을 거꾸로 걸었다.
센터가이 큰길은 아직 시끄러웠다. 그런데 한 블록만 꺾어 들어가자 소리가 뚝 끊겼다. 간판 불이 반쯤 나간 뒷길이었다. 셔터 내린 가게들 사이로 바람이 전단지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마코토가 그랬다. 해 지면 센터가이 뒷길은 좀 피해 주십사.
여기가 그 뒷길이었다.
부우웅.
뒤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쳐 내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늘어났다. 오토바이 두 대가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열 걸음쯤 가서 끼익 섰다.
"어? 어어? 루카 씨? 루카 씨 맞으시죠? 이 시간에 여기를, 아니 저희는 지금 제로 놈들 팩스 때문에 순찰을 도는 중이거든? 아, 중이거든요? 근데 하필 뒷길에서 하니비 에이스를 뵙다니, 이건 운명이, 아니 사고가, 아무튼 그러니까…"
앞 오토바이의 마코토였다. 뒷자리에서 누가 내렸다. 내 쪽은 보지 않았다.
"마코토. 돌아."
"네? 헤드는요? 헤드 빼고 저 혼자서 무슨 수로 센터가이 전체를…"
"센터가이. 한 바퀴."
마코토는 입을 다물고 핸들을 꺾었다. 엔진 소리가 골목 저편으로 빠져나가자 그 자리를 내 심장 소리가 채웠다.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검은 점퍼에 허리춤의 은회색 포케벨. 얼굴은 골목 안쪽으로 돌린 채였다.
"…뒷길."
두 글자였다. 어제 마코토가 열 배로 불려 놨던 경고를 이번엔 원본으로 들은 셈이었다. 그때는 '안 했다'더니.
마코토가 없으니 통역은 내 몫이었다. 여기 오지 말랬잖아. 그런데 목소리에 화가 없었다. 꾸짖는 말은 보통 끝이 올라가는데, 이 사람 말은 끝이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혼내는 소리가 아니라 확인하는 소리였다. 진짜 왔네, 하는.
"…와."
그가 걷기 시작했다. 나보다 반 발 앞이었다.
골목 중간쯤, 문 닫은 술집 앞에 남자 둘이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가 그를 보고는 도로 숙였다. 그는 걸음을 늦추지도 빨리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앞을 지나는 동안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나와 그 남자들 사이에 검은 점퍼가 한 장 들어와 있었다. 다 지나가자 어깨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들은 어떤 말보다 크게 들렸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하나 있었다. 아까 그 숫자, 받았어요? 제로, 하치, 욘, 제로. 좋은 아침. 그거 나예요.
"저기, 아까 그 숫자…"
그의 엄지가 허리춤의 포케벨 위에서 멈췄다. 문지르던 중이었는지 막 대려던 참이었는지 모를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걸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화난 소리는 아니었다. 듣기 싫다는 건지, 안 들어도 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오늘 밤 안에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입을 닫고 걸었다. 그의 엄지는 골목 끝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그가 멈췄다.
왼쪽은 더 어두웠고 오른쪽은 조금 덜 어두웠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집이 어디냐고도, 어디 가냐고도. 머리 위 가로등이 지지직거리다 꺼졌다가 다시 켜질 때까지 그냥 서 있었다.
기다리는 거였다. 내가 말할 때까지.
"…곤도 할아버지네 가요. 포토 인 곤도."
말해 놓고 귀가 화끈했다. 집 대신 사진관이라니. 그는 되묻지 않았다.
"…이쪽."
왼쪽, 더 어두운 쪽이었다. 그 등만 따라가면 되니까 어둡든 말든 상관없었다.
입에서 다른 말이 샜다.
"…춥다."
혼잣말이었다. 1999년 12월의 밤바람은 미니스커트를 봐주지 않았다.
"…빨리."
빨리 걸으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걸음은 하나도 빨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보폭에 맞춘 반 발 앞이었다. 빨리 들어가서 몸을 녹이라는 건지, 빨리 걷자고 해 놓고 자기는 천천히 걷겠다는 건지. 통역이 두 개 나왔는데 둘 다 마음에 들어서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 반쯤 내려온 셔터가 보였다. 셔터 틈으로 새어 나온 형광등 불빛이 바닥에 한 줄 깔려 있었다. 포토 인 곤도였다.
그는 모퉁이에서 멈췄다. 가게 쪽으로는 한 걸음도 더 가지 않았다.
"…여기까지."
선을 긋는 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네 길, 여기까지는 내 길. 그런데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그 선을 그어 준 것도 그였다.
"고맙습…"
"…됐다."
어제는 '됐어'였고 오늘은 '됐다'였다. 한 글자 차이인데 더 단단했다. 나는 셔터 쪽으로 두 걸음 가다가 돌아섰다. 지금 아니면 못 물어볼 것 같았다.
"저기, 아까 그…"
"…들어가."
그는 벌써 등을 보이고 있었다. 점퍼 주머니 안에서 주먹이 한 번 쥐어졌다 풀리는 게 천 너머로 보였다. 몇 걸음 가다가 한마디가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
"…밤이다."
밤이니까 들어가라는 건지, 밤에 치라던 그 밤이 아직 안 끝났다는 건지. 나는 통역을 포기했다. 심장이 먼저 대답해 버려서.
그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셔터 아래로 곤도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모퉁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또 왔냐, 아마미야 루카 학생. 이 밤중에."
"저… 집을 모르겠어요. 웃기죠?"
스물여섯 먹고 할 소리인가. 할아버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게 안쪽 긴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 긴 의자에서 자. 구석 기계는 건드리지 말고."
왜 집을 모르냐고도, 어디서 왔냐고도 묻지 않았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글쎄다" 하고 나사나 돌릴 할아버지였다.
의자는 딱딱했고 시큼한 인화지 냄새가 났다. 의자 바로 앞에 구석의 제일 낡은 기계가 서 있었다. 전원 불은 꺼져 있었다. 옆구리에 빛바랜 견본 스티커가 한 장 붙어 있었는데, 테두리를 은색 별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다른 기계에는 없는 무늬였다.
"할아버지. 저 별 무늬는요?"
할아버지가 쌕쌕 웃었다.
"글쎄다. 오래된 기계는 다 사연이 있지. 자, 불 끈다."
딸깍. 형광등이 꺼졌다.
가게 안이 깜깜해지자 셔터 틈 너머 바깥이 오히려 잘 보였다. 모퉁이 가로등 아래 바닥에 그림자 하나가 길게 누워 있었다. 모퉁이 너머에 선 누군가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불이 꺼지고도 한참 있다가 움직였다. 가게 안이 조용해진 걸 확인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러고는 가로등 불빛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기까지라며.
나는 포케벨을 가슴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계속 모퉁이에 서 있었다.
꿈은 또 왔다. 비 오는 골목, 엎어진 은회색 포케벨, 금 간 액정에 뜬 0840. 그 골목이 아까 그 뒷길을 닮았는지는 빗소리에 가려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날짜는 없었고, 이번에도 아침이 오기 전에 끝났다.
"학생, 일어나. 밖에 시끄러운 거 왔다."
눈을 뜨니 유리문 밖에서 누가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눈가의 펄이 아침 해를 받아 번쩍였다. 하니비 리더 아유였다. 그 뒤에서 막내 모모가 수첩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눈앞에 초록 화면이 떴다.
[1999년 12월 2일 목요일 / 맑음] [거리 소문: 높음] [세기말까지 남은 날: 29] [타치바나 렌 / 마음: ] [수신 감도: 끝내 잴 수 없음]
30이 29가 됐다. 하루가 진짜로 줄었다. 마음 칸은 오늘도 비어 있었다.
허리춤의 포케벨은 어두웠다. 좋은 아침이라고 보냈는데, 아침이 왔는데도 답이 없었다.
"루카찡!!"
문이 열리자마자 아유가 내 팔에 매달렸다.
"어제 어디로 샜어! 집에 전화했는데 안 받잖아! 특훈 첫날부터 빼먹었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곱빼기야! 가자, 109!"
"여기는 어떻게 알고…"
모모가 수첩을 살짝 들어 보였다.
"루카 선배는 집에 없으면 여기라고… 제가 적어 뒀거든요?"
곤도 할아버지는 쌕쌕 웃으며 드라이버만 돌렸다. 루카가 원래 여기 단골이었다고? 나는 그 수첩이 조금 무서워졌다. 내가 모르는 루카가 거기 다 적혀 있을 것 같아서.
109는 원통형 유리 건물이었다. 아침 해가 유리에 부딪혀 눈이 시렸다. 그 앞 인도에서 갸루들이 진열장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춰 보며 뭔가를 연습하고 있었다.
아유가 바닥에 은색 라디카세를 쿵 내려놨다. 어깨에 메고 다니는 커다란 카세트 라디오다. 버튼을 누르자 빠르고 높고 쓸데없이 신나는 전자음이 쏟아졌다.
파라파라. 다리는 거의 안 쓰고 팔로만 추는 춤이다. 영상에서는 쉬워 보였다.
"자, 원, 투! 오른팔 위! 손목 뒤집고! 왼쪽!"
내가 오른팔을 올리면 아유는 벌써 왼쪽이었고, 왼쪽으로 가면 아유는 돌고 있었다. 하니비 에이스의 몸인데 팔에도 다리에도 박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의 집에 들어왔는데 가구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각도! 각도가 틀렸잖아!"
아유가 내 팔꿈치를 붙잡고 꺾었다.
"손목은 사십오 도! 팔꿈치는 어깨보다 위! 시선은 손끝이잖아!"
"손끝 보면 앞이 안 보이는데…"
"갸루는 앞 안 봐! 손끝 봐!"
나는 손끝을 봤다. 그리고 앞을 못 봐서 라디카세를 걷어찼다. 음악이 툭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지나가던 남고생 둘이 키득거렸다. 모모가 옆에서 수첩을 펴고 소곤거렸다.
"라디카세 찬 거… 적어 둘게요?"
그런 것까지.
진열장 난간에 치나츠가 기대 서 있었다. 춤은 안 추고 팔짱을 낀 채 나만 봤다. 웃지도 않았다. 차라리 웃으면 덜 무서울 텐데.
그때 도로 쪽에서 부우웅, 소리가 났다.
오토바이 두 대가 신호에 걸려 109 앞에 섰다. 앞 오토바이에서 누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루카 씨! 좋은 아침입니다! 특훈이세요? 역시 하니비! 제로 놈들 팩스 때문에 지금 시부야가 난리거든? 아, 난리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밤새 순찰을 돌았고, 헤드께서는 그러니까…"
데라다 마코토, 무겐의 넘버 투. 숨 한 번에 다섯 문장이었다.
좋은 아침. 어젯밤 공중전화에서 내가 눌렀던 바로 그 말이 엉뚱한 사람 입에서 우렁차게 날아왔다. 심장이 한 번 쿵 내려앉았다.
뒷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 고개는 109가 아니라 도로 건너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보이는 건 앞머리와 턱 끝뿐이었다.
"마코토."
"네, 닥치겠습니다."
다섯 문장이 한 음절도 안 넘치고 거기서 끊겼다.
나는 팔을 든 채로 굳었다. 오른팔은 사십오 도, 시선은 손끝. 그 손끝 너머에 렌이 있었다. 어젯밤 술집 앞에서 어깨까지 기울여 준 사람이 오늘 아침엔 고개 하나 안 돌렸다.
"루카찡! 투! 투에서 돌아야지!"
몸을 돌렸다. 오른발이 왼발을 밟았고 왼발이 오른발을 걸었다. 세상이 반 바퀴 기울었다.
쿵.
엉덩이가 보도블록에 부딪혔다. 루즈삭스가 신발 밑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에에?" 하고 소리를 냈다. 하니비 에이스가 109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리 소문 칸은 원래 '높음'이었다. 더 올라갈 칸이 없어서 다행인지 모르겠다.
신호등이 파랑으로 바뀌었다. 차들이 움직였다.
오토바이 두 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코토가 핸들을 쥔 채 뒤를 힐끗 돌아봤다. 뒷자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차가운 보도블록에 엉덩이를 붙인 채 그걸 봤다. 파란불이 깜빡이다 빨강으로 돌아갔다. 왜 안 가지?
두 번째 파랑이 켜졌다. 차 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 하나가 떨어졌다.
"…출발."
내 쪽이 아니라 오토바이 앞쪽에 대고 한 말이었다. 두 대가 출발했다. 렌은 끝까지 이쪽을 보지 않았다.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 내가 가진 건 루카라는 이름 하나였다.
그리고 솔직히 화가 났다. 신호를 한 번 그냥 보내 놓고도 끝까지 쳐다보지 않는 사람한테. 그래, 보지 마. 안 보고는 못 배기게 해 줄 테니까.
…아니 잠깐만. 그 사람 보라고 추는 춤 아니거든.
이 몸은 파라파라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른 걸 안다. 서류에서 떨어진 밤마다 방에 혼자 누워 넘기던 숏폼 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일어나 루즈삭스를 대충 끌어올렸다.
"아유. 음악 처음부터."
팔은 아유를 따라갔다. 손목 사십오 도, 팔꿈치는 어깨 위로. 거기까지는 파라파라였다. 다리가 못 따라가는 자리마다 나는 내가 아는 걸 끼워 넣었다. 박자에 맞춰 검지로 하늘을 콕콕 찍었다. 엄지와 검지로 작은 하트를 만들어 가슴 앞에서 톡 튕겼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확 열고, 윙크 하나.
미래에서는 이런 걸 '챌린지'라고 부른다. 다 같이 따라 추는 짧은 춤이다.
처음엔 키득거림이 들렸다. 그다음엔 조용해졌다.
"뭐야, 저거?"
"신상이야? 신상 스텝이야?"
여고생 하나가 내 손가락 하트를 따라 했다. 옆에 있던 애가 또 따라 했다. 아까 키득대던 남고생 둘이 박수를 쳤다. 음악이 끝났을 때 109 앞에 작은 동그라미가 생겨 있었다. 나를 둘러싼 동그라미였다.
숨이 턱까지 찼다. 됐지? 됐어.
그리고 눈이 먼저 갔다. 동그라미 너머, 아까 그 신호등 아래로. 오토바이는 없었다. 당연하지. 두 번째 파랑에 갔으니까. 당연한데 목 안쪽이 시큰했다.
아유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루카찡… 그거… 뭔데?"
"어, 이거? 신상이지. 내가 만든 거야."
거짓말이었다. 정확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만든 거다.
아유의 얼굴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감동한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했다.
"초베리… 아니야! 각도! 그래도 각도는 틀렸잖아!"
웃음이 터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길 건너 모퉁이에 오토바이 두 대가 서 있었다. 간 줄 알았는데. 마코토는 담배 자판기 앞에서 캔을 꺼내고 있었다. 렌은 오토바이 옆에 서 있었다. 이쪽에 등을 돌리고 반대쪽을 보면서.
마코토가 목청을 높였다. 길 건너까지 다 들렸다.
"헤드! 방금 루카 씨 그거 보셨어요? 손가락으로 하트를 톡, 이렇게, 109 앞에서 지금 동그라미가…"
"…안 봤다."
등을 돌린 채였다. 낮은 목소리가 차 소리 사이로 정확히 건너왔다.
"아, 안 보셨죠. 신호를 두 번 그냥 보내셨지만 안 보셨죠. 네네."
나는 웃음을 삼키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 두 번을 나는 바닥에 앉아서 다 봤다. 안 본 사람은 동그라미가 제일 잘 보이는 모퉁이에 서 있지 않는다. 이 길 위에서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아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게 이상하게 뿌듯했다.
마코토는 신이 나서 캔을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을 들었다.
"근데 이거 이렇게 하는 거죠? 엄지랑 검지를 이렇게, 톡…"
"…하지 마."
마코토의 손가락 하트가 자판기 불빛 아래서 반쯤 접힌 채 굳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 마코토가 하니까 꼴 보기 싫어서? 아니면 그게 아까 저 동그라미 한가운데서 내가 하던 거라서? 어느 쪽인지 몰라서 귀가 먼저 뜨거워졌다.
렌의 엄지가 허리춤의 포케벨을 한 번 문질렀다. 그러다 엄지가 한 박자 멈췄다.
그 한 박자 사이에 등을 돌린 그의 턱 끝이 이쪽으로 반쯤 왔다. 그러고는 돌아갔다. 본 건 아니었다. 보려다 만 거였다.
"…가자."
렌은 오토바이에 올랐고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엄지가 멈춘 게 나 때문이었는지 그냥 버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른다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일 줄은 몰랐다.
패밀리 레스토랑 창가 네 자리. 스티커투성이 테이블 위에 아유가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맨 위에 매직으로 '하니비 이번 주 서열'이라고 적혀 있었다.
"매주 목요일 발표잖아." 아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스텝이랑 각도랑 잡지 앙케트 다 합친 거야."
아유가 맨 위 칸 스티커를 손톱으로 조심조심 떼어 냈다. 브이를 한 루카였다. 아유는 그걸 맨 아래 칸에 옮겨 붙였다.
꼴찌였다. 아까 109 앞의 동그라미는 진짜였지만 서열표에 '동그라미' 칸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주 하니비 에이스는… 없어!"
모모가 작게 "아…" 했다. "루카 선배가 꼴찌 한 거… 처음이에요."
"근데!" 아유가 빨대를 탁 내려놨다. "그 손가락! 하트 톡 하는 거! 다음 주까지 나한테 가르쳐! 그거 파라파라에 넣으면 우리가 이 거리 일 등이잖아!"
꼴찌를 하고 숙제를 받았다. 떨어진 건 루카의 이름값이었고 숙제를 받은 건 나였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들었지? 제로가 무겐한테 신청서 보낸 거." 아유가 목소리를 낮췄다. "밀레니엄 밤에 센터가이를 건대. 지는 쪽은 이 거리에서 나가는 거래. 우리는 끼면 안 돼. 갸루사는 중립이니까. 알지, 루카찡?"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어젯밤 그 모퉁이를 떠올렸다. 그 팩스 때문에 그 사람은 밤새 이 거리를 돌았고, 그러다 뒷길에서 나를 주워 사진관 앞까지 데려다 놓고 말했다.
"…여기까지."
선을 그은 건 그 사람이었다. 그러고는 그 선 바깥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그 위로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아, 마, 미, 야, 씨. 접수되었습니다.
이미 낀 것 같은데.
아유가 루즈삭스 풀을 사러 가자며 모모를 끌고 나갔다. 모모는 끌려가면서도 나를 한 번 돌아봤다. 테이블에는 나와 치나츠만 남았다.
치나츠는 하루 종일 거의 말을 안 했다. 지금도 빨대만 씹고 있었다.
"니."
낮고 짧았다. 웃음기는 하나도 없었다.
"아까 그 춤. 어데서 배웠노."
"아, 그거… 내가 만들었다니까."
"웃기고 있네."
치나츠가 빨대를 컵에 도로 꽂고 지갑을 꺼냈다. 안쪽 투명한 칸에서 스티커 한 장을 조심스럽게 빼내더니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가락 두 개로 밀어 내 앞까지 보냈다.
프리쿠라였다.
루카가 혼자 찍혀 있었다. 브이도 없었고 웃지도 않았다. 서열표의 루카와 같은 얼굴인데 펄이 하나도 빛나지 않았다. 어둑한 기계 안에서 렌즈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하니비 에이스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은색 별 테두리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어젯밤 내가 잔 긴 의자 바로 앞, 불 꺼진 그 기계 옆구리에서 본 무늬였다. 다른 기계에는 없는 무늬.
아래 귀퉁이에 사인펜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11.30.
내가 이 몸으로 깨어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니 그날 아프다 캤제. 내한테 전화로. 하루 종일 집에 누워 있었다꼬."
치나츠의 목소리가 한 칸 더 낮아지고 한 박자 더 느려졌다.
"근데 이게 와 내 손에 있노."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진 속 루카도 대답하지 않았다. 웃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답을 반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입을 열 수 없었다.
치나츠가 테이블 위로 몸을 숙였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하나만 묻자."
테이블 밑에서 내 엄지가 분홍 포케벨 액정을 문지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랐다. 어젯밤 "여기까지" 하고 돌아선 그 사람의 버릇이었다. 이번엔 허둥대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나를 붙들어 주는 게 그것뿐이었다. 창밖에서 센터가이 간판 불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이 날, 니 어디 있었노."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