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서는 법
"…모르겠어."
반은 거짓말이었다. 나머지 반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구급차가 올 얘기였다.
치나츠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봤다.
"아마미야 루카. 니가 모른다꼬."
"응. 기억이… 안 나."
"웃기고 있네."
치나츠가 손가락 하나로 프리쿠라를 톡 두드렸다.
"이거 내가 어데서 났는지는 아나. 어제 점심때 니 찾으러 곤도 할배 가게 갔다. 니는 없고."
니는 없고. 그 말이 목에 걸려서 내려가지 않았다. 내가 그 가게 바닥에서 눈을 뜬 건 해가 다 진 뒤였다.
"구석에 불 꺼진 기계 하나 있제. 사진 나오는 구멍에, 이게 걸려 있더라. 딱 한 장, 덜렁."
목덜미에 찬 손이 닿은 것 같았다.
"알아. 은색 별 붙은… 그 기계." 내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근데 그 기계… 전원 꺼져 있던데."
"그러니까 말이다. 할배한테 물었더니 '글쎄다' 카더라. 내 얘기는 그게 다다."
글쎄다. 어젯밤에는 노인네 능청인 줄 알았다. 지금 다시 들으니 아는 걸 덮는 소리였다.
치나츠가 스티커를 지갑 안쪽 칸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 소리가 테이블 위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니 기억날 때까지, 이거는 내가 갖고 있을끼다."
치나츠가 먼저 일어섰다. 대화는 늘 치나츠가 먼저 끊는다.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봤다.
"됐고. 다음 주 서열은 꼴찌 하지 마라. 쪽팔린다."
딸랑. 문종이 울리고 치나츠가 사라졌다.
십일월 삼십일에 루카는 꺼진 기계 앞에서 웃지도 않고 혼자 사진을 찍었다. 십이월 초하루 낮에 이 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해가 지자 그 안에서 내가 깼다. 을지로의 그 기계도 플러그가 빠져 있었는데.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한 발만 더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데까지 갈 것 같았다. 얼음만 남은 컵을 빨대로 쭉 빨았다. 바닥 긁는 소리만 났다.
"루카찡! 치나츠 또 먼저 갔어? 진짜 너무하잖아!"
아유가 모모를 달고 돌아왔다. 품에는 루즈삭스 풀을 안고 있었다. 하니비의 생명줄이라는 그 풀을 내려놓자마자 아유는 손가락 하트를 내밀었다.
"이거 맞아? 엄지가 더 서야 되잖아!"
엄지 두 개가 하늘로 솟았고, 그 밑에서 검지 두 개가 딱딱 부딪쳤다.
"아유, 그거 하트 아니고 게 집게야."
"게 아니거든!"
아유는 게 집게를 한 채로 "엄마가 문 잠그기 전에 가야 돼! 모모, 내일 봐!" 하고 뛰어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집게가 유리 너머에서 딱딱거렸다.
모모는 남았다. 수첩을 끌어안고 조심조심 물었다.
"루카 선배, 오늘 밤도… 곤도 할아버지네서 자요?"
"응. 아마."
"그럼 하치코 출구 들렀다 가요? 가는 길이잖아요."
하치코 출구라는 말에 손바닥이 먼저 기억해 냈다.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접어 주던 손이 있었고, 어깨 너머로 세 마디가 떨어졌다.
"쳐. 밤에."
창밖은 벌써 밤이었다.
모모가 하필 그 출구를 고른 게 우연 같지 않았다. 모모의 눈이 수첩 위로 반만 올라와 있었다. 어젯밤 내가 거기 서 있던 걸 이 애는 알고 있었다.
"모모야. 너, 그것도 적어 뒀어?"
"아, 아니에요! 그건 안 적었어요. 진짜요."
수첩 모서리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적어 둔 거다.
밤의 하치코 출구는 어제보다 붐볐다. 녹색 공중전화 네 대 앞으로 겨울 코트들이 길게 줄을 섰다. 다들 휴대폰으로 갈아탔다더니.
"휴대폰은 비싸잖아요. 포케벨은 싸고요." 모모가 내 얼굴을 읽고 말했다. "그리고… 숫자로 하는 말은 휴대폰으로 하면 맛이 없대요."
맛이라니. 2026년의 나는 읽고도 답 안 하는 '읽씹'에서 쓴맛만 봤는데.
줄 끝에 서자마자 모모가 내 소매를 당겼다.
"선배, 너무 붙었어요. 앞사람이랑 한 걸음 반이요."
한 걸음 반 앞에는 넥타이를 반쯤 푼 아저씨의 등이 있었다. 부스 안을 보려고 고개를 빼자 모모가 또 당겼다. "손가락 보면 안 돼요. 등을 봐요." 아저씨는 버튼 하나에 한숨 하나를 쉬었다. 숫자보다 한숨이 많았다. 그다음 여고생은 수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양손 엄지로 따다다닥 두드렸다. 세 번째 메시지가 끝나자 줄 어딘가에서 헛기침이 났고, 여고생은 수화기를 탁 내려놓고 나왔다.
"뒤에 사람 있으면 세 번까지요." 모모가 속삭였다. "그리고 넷째는요, 누를 때…"
"잠깐잠깐. 그거 누가 정했는데?"
"…모르는데요? 원래 그래요. 그게 예법이에요."
"와… 진짜로 지키네."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아무도 어기지 않았다. 넷째 규칙은 내 질문에 끊겨서 그대로 묻혔다.
내 앞에 두 사람이 남았을 때 모모가 물었다.
"선배, 오늘도 번호 안 붙이고 보내요?"
오늘'도'. 어젯밤에도 봤다는 얘기였다.
"번호?"
"보내는 사람 번호요. 숫자 다 누르고 샵 누르기 전에 자기 포케벨 번호를 이어서 누르면, 받는 사람 액정에 같이 떠요. 그럼 누가 보냈는지 알고 답장도 하죠. 안 붙이면…"
모모가 말끝을 흐렸다. 안 붙이면 허공에 대고 인사하는 거다. 어젯밤 내가 그랬다.
"붙이면 되지. 내 번호는…"
입이 멈췄다. 허리춤의 분홍 포케벨을 빼서 뒤집었다. 하트, 별, 고양이 스티커 세 장이 붙어 있었다. 번호는 없었다.
…아니 잠깐만.
남의 몸이었다. 2026년에도 내 번호는 휴대폰이 대신 외우고 있었다.
"모모야. 나… 내 번호 몰라."
모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랐는데 어딘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수첩이 휙휙 넘어가다 멈췄다. 맨 위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루카 선배'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생일, 좋아하는 립글로스 색, 그리고 열 자리 숫자가 있었다.
모모가 숫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그 순간만은 막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하고 분명했다.
"…맞죠, 루카 선배?"
"어. 응. 맞아."
맞는지는 나도 몰랐다. 이 애 수첩 속의 루카가 나보다 훨씬 진짜였다.
그 쪽에 빈칸이 하나 있었다. '집'이라고 써 놓고 뒤가 비어 있었다.
"선배가 절대 안 알려 줬잖아요. 집 얘기만 나오면 '곤도 할아버지네' 하고 웃었어요."
처음부터 아무도 몰랐던 거다.
모모 볼펜을 빌려 손바닥에 열 자리를 적었다. 모모는 수첩에 또 뭔가를 적었다.
"'루카 선배, 자기 번호 모름.' 적어 둘게요?"
"…그것까지?"
부스 안의 녹색 전화기는 어제처럼 미지근했다. 카드를 꽂자 작은 액정에 숫자가 떴다. 사십구.
남은 밤은 스물아홉이다. 하룻밤에 한 번이면 버티고, 두 번이면 모자란다. 그 사람이 쓰러지는 밤에 카드가 비어 있으면 어떡하지.
쪽지의 열 자리, 렌의 번호를 누르고 메시지로 넘어갔다.
"제로, 하치, 욘, 제로…"
"선배! 소리 내면 안 돼요!"
모모가 유리를 손톱으로 톡톡 쳤다. 아까 내가 끊어 먹은 넷째가 그거였다. 누를 때는 소리 내지 않는다. 줄에 선 몇 사람이 웃음을 참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무니까 버튼 소리가 들렸다. 숫자마다 소리가 조금씩 달랐다. 제로는 그중에서 혼자 둔하고 낮았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였다.
제로, 하치, 욘, 제로. 오, 하, 요오. 좋은 아침.
엄지가 손바닥의 열 자리로 갔다가 첫 숫자 위에서 멈췄다.
붙이면 기다리게 된다. 기다리면 안 오는 게 보인다. 오늘 아침 109 앞에서 그 사람은 끝까지 이쪽을 보지 않았다. 번호까지 붙였는데 답이 없으면, 그땐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게 된다.
무서웠다. 그게 다였다.
샵을 두 번 눌렀다. 번호는 붙이지 않았다. 카드가 위잉 하고 밀려 나왔다. 사십팔.
"도수 아낀 거야."
부스에서 나오며 모모한테 말했다. 모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 알면서 안 묻는 법을 이 애는 어디서 배웠을까.
"나갈 때는 줄 선 사람 얼굴 안 봐요. 그것도 예법이에요."
나는 시선을 발끝에 두고 줄 옆을 걸었다. 운동화, 로퍼, 하이힐, 또 로퍼.
맨 끝의 신발은 검은 워커였다. 앞코에 흙탕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시선이 예법을 어기고 올라갔다. 허리춤에 은회색 포케벨이 있었다.
타치바나 렌이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고개는 비스듬히 차도 쪽으로 돌렸다. 보이는 건 이번에도 턱선과 앞머리뿐이었다. 앞에 선 여고생 셋 사이의 한 걸음 반은 슬그머니 세 걸음이 돼 있었다.
눈앞에 초록 줄 하나가 켜졌다가 꺼졌다.
[수신 감도: 끝내 잴 수 없음]
다른 칸은 켜지지도 않았다. 잴 수 없다는 말을 굳이 지금 한 번 더 하러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 옆에서 멈춰 버렸다. 예법 위반이었다.
"…줄."
차도를 본 채였다. 차도한테 하는 말인가 싶을 만큼 낮았다. 하지만 차도는 줄을 서지 않는다.
"아, 저, 줄 서는 거 아니에요. 나가는… 거예요."
"…알아."
알아. 뭘? 내가 나가는 걸? 방금 부스에서 "제로, 하치, 욘, 제로" 소리 내 세다가 막내한테 혼난 걸? 아니면 그 숫자가 어디로 갔는지까지? 통역이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셋 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쪽이었다.
발이 보도블록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 걸음 반."
십 분 전 모모가 내 소매를 당기며 한 그 말이 시부야 제일 주먹의 입에서 나왔다. 너무 붙었다는 소리였다. 나는 정확히 한 걸음 반 물러났다.
등 뒤에서 모모가 숨소리만으로 말했다.
"…헤드도 줄은 서요. 그게 규칙이에요."
"…다 선다."
들은 거다. 모모가 딸꾹질 같은 소리를 냈다. 뭘 묻냐는 투도 귀찮다는 투도 아니었다. 비가 오면 젖는다고 말하는 투였다. 그래서 더 웃겼다. 웃음이 터지기 직전에 내 눈이 또 그 턱선을 찾아 올라갔다.
"…발끝."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워커 앞코의 말라붙은 흙탕물 자국이 지도 같았다. 이 사람은 갸루 막내의 예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다.
모모 손에 끌려 그 옆을 지나갔다. 팔 하나 거리였다. 숨을 어디서 쉬어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주먹 쥔 손바닥에서 땀이 나서 열 자리가 번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한 걸음 사이에 냄새가 스쳤다. 밤공기에 식은 가죽과 차가운 쇠, 아주 조금 남은 담배. 어제 내 손목을 당기던 손에서 나던 냄새였다.
두 걸음 더 갔을 때 자전거 벨이 짧게 울렸다. 자전거 한 대가 보도 쪽으로 기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자전거."
몸이 먼저 섰다. 자전거가 내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은 닿지 않았다. 목소리만 닿았다. 그런데 손목을 당겼던 어제보다 그게 더 오래 남았다.
등 뒤에서 한마디가 더 떨어졌다.
"…곤도네."
돌아보지 않았다. 예법이니까. 예법이 아니었어도 못 돌아봤을 거다. 곤도네로 가서 자라는 소리였다. 어젯밤 그 모퉁이까지 나를 데려다 놓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선배." 모모가 숨소리로 물었다. "헤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거짓말이었다. 모모가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이번에는 안 적었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제야 셈이 맞았다. 부스에 들어갈 때 나는 줄 뒤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내가 부스 안에서 버튼을 누를 때 저 사람이 이미 줄 끝에 와 있었다면, 내가 0840을 누른 순간 몇 걸음 뒤에서 저 허리춤이 떨렸을지도 모른다.
번호를 붙였으면 지금 저 액정에 내 번호가 떠 있었을 거다.
나는 가지 않았다. 갈 수가 없었다.
모모를 끌고 버스 정류장 기둥 뒤로 갔다. 줄이 다 보이는 자리였다. 모모는 "선배, 이거 예법에…" 하더니 말을 삼키고 같이 숨었다.
그때 스카잔을 입은 남자 하나가 역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맨 앞 부스 옆에 쓱 붙었다. 새치기였다. 줄 전체가 그 남자를 봤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한 건 맨 끝이었다.
"…뒤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 하치코 출구 소음 위로 정확히 건너갔다. "아 뭐, 급해서 그런…" 하고 돌아보던 남자가 맨 끝의 은회색 포케벨을 봤다.
"…다들 급하다."
한 박자 쉬었다.
"…줄."
남자는 뒤로 가라는데 아예 역 안으로 사라졌다. 줄 선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앞사람 등을 봤다. 시부야 제일의 주먹이 주먹 대신 '줄'로 싸웠다. 갸루 막내의 예법을 무겐 헤드가 집행했다. 모모는 기둥을 끌어안고 소리 없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자기 수첩이 시부야의 법이 된 얼굴이었다.
나는 웃음을 삼키느라 기둥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그러다 주머니 속 카드가 손에 잡혔다. 사십팔. 저 줄 끝에 한 번 더 서면, 이번에는 손바닥의 열 자리까지 붙여서.
"…한 번 더 보낼까."
혼잣말이었다.
"선배, 아까 도수 아낀다면서요."
모모가 속삭이자마자 줄 끝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고개는 차도 쪽 그대로였다.
"…다음 밤."
나는 기둥에 등을 붙였다. 줄 선 사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사람은 기둥 뒤에 하나 남아 있었다. 오늘 밤 몫은 끝났다. 하룻밤에 한 번이면 스물아홉 밤을 버틴다. 내 카드 셈을 저 사람이 세 글자로 대신 끝내 줬다.
그 사이 렌은 엄지로 허리춤의 포케벨을 딱 한 번 문질렀다. 액정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다는 걸 아는 손이었다.
여고생 셋이 차례로 들어갔다 나왔다. 셋 다 나오면서 렌 쪽을 안 보려고 목을 이상한 각도로 꺾었다. 아유가 봤으면 각도가 틀렸잖아, 했을 거다.
그리고 줄에는 그 사람만 남았다.
렌은 부스 앞에서 멈췄다. 흠, 하고 헛기침이 하나 났다. 고개는 차도 쪽 그대로인데 그 소리는 이쪽으로, 기둥 쪽으로 왔다.
"…가라."
모모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들킨 거다. 모모가 혼자라도 나가 보겠다는 듯 반 발 움직였다.
"…둘 다."
모모가 도로 붙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늦었다."
화난 소리는 아니었다. 시계를 보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 대신 밤을 세 주는 사람. 그래도 몸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기둥 뒤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부스 문을 잡은 채로 그가 멈췄다. 한참 있다가 한마디가 더 왔다.
"…기둥 뒤."
가라던 사람이 이번에는 서 있을 자리를 정해 줬다. 차도에서 먼 쪽, 자전거가 안 오는 쪽이었다. 모모가 내 팔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부스에 들어갔다.
차도를 등지고, 그러니까 나를 등지고 섰다. 넓은 등이 유리 한 칸을 통째로 덮었다.
숫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들렸다. 밤거리 소음 사이로, 부스 문틈으로 버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삐. 삐. 삐.
숨을 참고 셌다. 고르게 이어지던 소리가 열에서 뚝 끊겼다. 열 자리, 번호가 끝났다. 이제부터가 할 말이었다.
삐.
첫 소리는 둔하고 낮았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까 입을 다문 내 손가락이 처음 누른 그 소리와 같았다. 같았던 것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을 숨과 같이 삼켰다.
한참 쉬었다.
삐.
또 한참.
"선배… 되게 오래 걸려요." 모모가 속삭였다. "누구한테 보내는 걸까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0840을 누르는 데 숨 한 번이면 됐다. 그 사람은 숫자 하나를 누르고 다음 숫자까지 숨을 몇 번이나 쉬었다.
삐.
번진 손바닥 위에 분홍 포케벨을 올려놓았다. 액정은 어두웠다. 당연했다. 저 사람은 내 번호를 모른다. 내가 안 붙였으니까. 도수를 아끼는 척하면서.
삐.
네 번째 소리에서 멈췄다. 네 자리였다. 내가 보낸 것도 네 자리였다.
샵 누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 보냈으면 샵을 누르고 내려놓으면 된다. 포케벨은 대답하는 기계가 아니라서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뒤에 기다리는 사람 하나 없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새끼부터 하나씩 접었다. 쪽지를 쥐여 주던 날 그 사람이 내 손가락을 접어 주던 순서 그대로였다. 번진 열 자리가 주먹 안에 갇혔다.
유리 한 장과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사람은 수화기를, 나는 그 사람이 모르는 내 번호를 쥔 채 둘 다 내려놓지 못했다.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