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소리
빗소리가 먼저 들렸다.
좁은 골목이었다. 간판 네온이 젖은 아스팔트에 번져서 바닥이 온통 분홍빛, 푸른빛이었다. 물웅덩이에 구겨진 쪽지 하나가 떠 있었다. 사인펜으로 쓴 숫자가 빗물에 풀려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 얼굴은 저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젖은 앞머리, 힘이 다 빠진 손. 그 손 옆에 은회색 포케벨이 엎어져 있었다.
삐, 삐, 삐.
울릴 때마다 포케벨이 아스팔트 위에서 부르르 떨다가 반쯤 뒤집혔다. 금 간 액정에 초록 불이 들어와 있었다. 숫자 네 개.
제로. 하치. 욘. 제로.
나는 그 사람 이름을 불러야 했다. 불러야 한다는 것만 알았고, 이름은 몰랐다. 입을 벌려도 빗소리만 들어왔다. 날은 밝지 않았다. 이 꿈은 늘 거기서 끝났다. 아침이 오기 전에, 날짜도 없이.
"…또 그 꿈이네."
머리맡 폰에는 '한지유 님, 귀하의 역량은 뛰어나나…'로 시작하는 문자가 와 있었다. 스물여섯, 취준 3년 차. 내 아침 인사는 늘 이런 문자가 먼저 했다.
꿈은 두 주 전부터였다. 을지로 만물상 계산대 옆, '옛날 스티커 한 장 3천 원'이라고 써 붙인 상자에서 그걸 집은 날부터.
1999라는 숫자가 찍힌 프리쿠라, 일본 오락실의 즉석 사진 스티커였다. 까맣게 태운 얼굴에 하얀 아이섀도, 거의 하얀 금발. 밈으로만 보던 갸루 언니가 브이를 하고 있었다. 옆의 남자는 얼굴이 프레임 밖으로 잘려 어깨랑 턱 끝만 남았다. 아래 귀퉁이에 사인펜으로 0840.
포케벨 암호였다. 뜻은 검색창이 알려 줬다. 그날 밤부터 그 꿈을 꿨다.
그래서 오늘 다시 갔다. 주인 할머니는 자리에 없었고, 가게 구석에 그게 있었다. 비닐 커튼이 반쯤 찢어진 고물 프리쿠라 기계. 플러그는 바닥에 빠져 있는데 전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근데 사람이 한번 꽂히면 그렇게 된다. 커튼을 걷고 들어가 스티커를 화면 앞에 대 봤다. 잘린 남자의 어깨가 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동전도 안 넣었는데 화면 속 숫자가 줄어들었다. 3. 2. 1.
찰칵.
셔터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터졌다. 세상이 하얘졌다.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눈을 뜨니 다른 가게였다. 낡은 프리쿠라 기계 세 대, 달궈진 인화지 냄새. 유리문 밖은 벌써 캄캄했다. 구석 TV에서는 저녁 뉴스 아나운서가 노스트라다무스를 일기예보처럼 읽고 있었다. 내일은 맑고, 세상은 한 달 뒤에 끝날 수도 있단다. 일본어였는데 다 알아들었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스티커도, 지갑도, 폰도 없었다. 대신 기계 옆 거울에 누가 서 있었다.
까맣게 태운 피부에 눈두덩엔 하얀 펄, 탈색한 금발. 체크 미니스커트 아래로 흰 양말이 발목에서 주름져 흘러내렸다. 허리춤에는 분홍색 포케벨. 볼을 꼬집었더니 거울 속 갸루도 아픈 얼굴을 했다.
…아니 잠깐만. 이 얼굴, 스티커에서 브이 하던 그 언니잖아.
"깼냐, 학생."
계산대 뒤에서 할아버지 하나가 드라이버로 기계 뒤판을 만지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여기 어디예요? 저 방금 을지로에서…"
"시부야." 할아버지가 나사를 하나 빼면서 말했다. "포토 인 곤도. 내가 곤도고."
계산대 옆 일력에 커다란 숫자가 박혀 있었다. 1999년 12월 1일.
"저 돌아가야 되는데요! 저 기계에 들어갔더니 갑자기…"
곤도 할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는 대신 구석의 제일 낡은 기계를 턱으로 가리켰다.
"돌아가고 싶어? 그 기계 말이야."
"네! 당연하죠!"
할아버지는 쌕쌕거리며 웃더니 다시 나사를 돌렸다.
"돌아가는 문도 공짜는 아니야. 필름값이 요새 얼마나 올랐는지 알아?"
대답은 그게 다였다. 구석의 그 기계는 커튼이 멀쩡했고, 전원 불은 꺼져 있었다.
밖은 센터가이였다. 간판이 층층이 쌓인 밤거리. 비가 막 그쳐 바닥마다 네온이 고여 있었다. 역 쪽 녹색 공중전화 앞에는 줄이 길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서. 'Y2K 시부야 감성' 영상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건너뛰기 버튼만 없었다.
그래서 못 봤다. 골목에서 남자 셋이 따라 나오는 걸.
"어이. 너 하니비 아마미야 루카 맞지?"
아마미야 루카. 이 얼굴 이름인가 보다. 셋이 나를 담벼락 쪽으로 몰았다.
"하니비 에이스면 돈도 좀 있겠네. 지갑 좀 보자."
"신고할 거예요."
당당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폰이 없다. 당연하지, 1999년인데. 손에 잡힌 건 립글로스 하나랑 '50'이라고 찍힌 텔레폰카드 한 장. 신고를 하려면 저 공중전화 줄 맨 끝에 서야 했다.
남자 하나가 내 손목을 잡으려던 참이었다.
부우웅.
오토바이 두 대가 웅덩이를 밟고 골목 어귀로 꺾어 들어왔다. 흙탕물이 촥 튀었다. 앞 오토바이가 다 서기도 전에 뒷자리에서 누가 뛰어내렸고, 그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몸이 반 바퀴 돌았다.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뒤 오토바이 바퀴가 미끄러져 지나갔다.
손목을 잡은 손은 차가웠고, 금방 놓았다.
"비켜."
낮은 목소리였다. 크지도 않았다. 그 남자는 나를 보지 않고 내 어깨 너머로 셋을 보고 있었다. 검은 점퍼에 젖은 앞머리, 그 아래로 비스듬히 돌아간 턱 끝. 허리춤에는 은회색 포케벨.
뭔가가 목에 턱 걸렸다. 그게 뭔지 생각할 틈은 없었다.
셋 중 하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겐… 무겐 헤드다. 타치바나 렌."
그걸로 끝이었다. 셋은 골목 안으로 흩어졌다. 영화였으면 한 대는 쳤을 텐데, 이 사람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서 있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흩어지는 등에 대고 그가 딱 한마디를 던졌다.
"하니비. 건드리지 마."
골목 안쪽에서 "예, 옙!"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고, 고맙…"
"…됐어."
내 쪽은 보지도 않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앞 오토바이에서 내린 남자가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잠깐잠깐잠깐, 루카 씨, 처음 뵙겠습니다, 아니 처음은 아니지만 아무튼, 팀 무겐 넘버 투 데라다 마코토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헤드 말씀은요, '됐어'가 그냥 됐어가 아니라 고맙단 말은 필요 없다는 거고, 그리고 방금 '하니비 건드리지 마'는요, 요즘 이 골목에 외지 놈들이 들어오니까 하니비 분들도 해 지면 센터가이 뒷길은 좀 피해 주십사 하는, 아무튼 그게 무겐의 공식 입장이거든? 아, 입장이거든요?"
여섯 글자를 숨 한 번에 열 배로 불려 놨다. 나는 웃음이 새지 않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깨 너머에서 한마디가 떨어졌다.
"…안 했다."
"아, 안 하셨죠. 네. 행간이죠, 행간."
마코토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국 코로 웃음이 샜다. 그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걷기 시작했다. 신호등 불빛이 번지는 큰길 쪽이었다.
"아, 루카 씨, 큰길까지 모셔다드리라는 게 헤드 말씀이거든요?"
헤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침묵까지 통역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는 나보다 반 발 앞에서 걸었다. 딱 반 발이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는데 내가 따라가는 속도에 맞춰져 있었다.
"끌고 와."
뒤쪽 무겐 애들한테 한 말이었다. 오토바이 두 대가 시동을 끈 채 질질 끌려오기 시작했다. 헤드가 걸으면 오토바이도 걷는 모양이었다.
좁은 골목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슬쩍 걸음을 빨리해 그 옆에 나란히 서 보려고 했다. 얼굴 좀 보려고. 진짜 그냥, 학술적 호기심으로.
"…뒤로."
앞을 본 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반 발 물러났다.
통역하면 '내 뒤에 있어.' 이거 명령이야, 걱정이야? 마코토라면 열 문장은 뽑았을 텐데, 나는 한 문장도 못 뽑고 귀만 뜨거워졌다.
골목 어귀에 깨진 병 조각이 네온을 받아 반짝였다.
"…발밑."
나는 병 조각을 넘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보지도 않으면서 내 발밑은 어떻게 아는 건데.
골목 끝 가게 쇼윈도에 브라운관 TV가 열 대쯤 쌓여 전부 같은 노스트라다무스를 틀고 있었다. 2026년 사람으로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이라 발이 저절로 느려졌다.
"…야."
이름도 아니고 루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종종걸음으로 반 발 뒤에 다시 붙었다.
그때였다. 앞서던 걸음이 아주 잠깐 늦어졌다. 내가 숨을 고를 만큼만.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원래 속도로 돌아갔다.
개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더 문제였다.
큰길로 나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사람 소리, 자동차 소리, 신호등의 초록 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
"거기서 기다려."
무겐 애들이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가 내 앞으로 왔다. 얼굴은 여전히 비스듬히 돌린 채였다.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뭔가를 눌러 넣었다. 종이였다. 구깃,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새끼손가락, 약지, 가운뎃손가락, 검지, 마지막으로 엄지. 쪽지가 내 주먹 안에 다 갇힐 때까지였다. 하나가 접힐 때마다 차가운 손끝이 손바닥을 한 번씩 스쳤다. 그런데 뜨거워지는 건 내 손이었다.
"쳐. 밤에."
그가 손을 거뒀다. 나는 주먹을 폈다. 수첩 귀퉁이를 찢은 종이에 사인펜으로 숫자 열 개. 그 사람 포케벨 번호일 것이다. 앞자리는 그냥 숫자였다. 끝 네 자리에서 눈이 멈췄다.
"제로."
입이 먼저 움직였다.
"하치. 욘. 제로."
0은 동그라미처럼 생겨서 '오'. 8은 하치의 '하'. 4는 욘의 '요'. 끝의 0은 소리를 따로 내지 않고 앞의 '요'를 길게 늘인다. 검색창에서 글자로만 봤던 규칙이 내 입에서 소리가 되어 이어 붙었다.
"오. 하. 요오."
오하요. 좋은 아침.
밤에 치라고 준 번호가 좋은 아침으로 끝났다. 그 어긋남이 이상하게 가슴 한가운데를 콕 찔렀다.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어보면 대답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치코."
한 박자 늦게 날아온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공중전화."
묻지도 않은 걸 알려 줬다. 내가 아까 그 줄 맨 끝을 보면서 오만상을 쓰던 걸 본 건가.
그리고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꿈에서 엎어져 있던 은회색 포케벨이, 지금 이 사람 허리춤에서 신호등 불빛을 받고 있었다.
손이 풀렸는지 쪽지 끝이 바람에 팔랑 들렸다.
"…쥐어."
나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접어 준 그대로.
그 순간 눈앞에 초록 화면이 켜졌다. 옛날 삐삐 액정처럼 흐릿하고 촌스러운 초록이었다. 나한테만 보이는 게 분명했다. 마코토는 그 화면 너머에서 아무렇지 않게 헬멧 끈을 만지고 있었으니까.
[1999년 12월 1일 수요일 / 비 그침] [거리 소문: 높음] [세기말까지 남은 날: 30] [타치바나 렌 / 마음: ] [수신 감도: 끝내 잴 수 없음]
마음 칸 하나만 비어 있었다. 날짜, 날씨, 거리 소문까지 다 재 주면서 이 사람 마음만은 못 잰단다. 그것도 '아직'이 아니라 '끝내'.
그리고 꿈에는 날짜가 없었다. 그 밤이 남은 서른 날 중 어디쯤인지 나는 몰랐다.
"…이름."
어깨 너머로 한마디가 날아왔다. 묻는 말인데 끝이 올라가지 않았다.
"아, 헤드 말씀은 그러니까 성함을, 아니 루카 씨 성함이야 시부야가 다 알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한 번…"
"마코토."
"네, 닥치겠습니다."
뚝. 진짜 칼같이 끊겼다. 나는 그 사람 옆얼굴을 봤고, 입이 먼저 움직였다.
"지…"
혀끝에 걸린 내 이름을 삼켰다. 여기선 그 이름이 아니지.
"…루카. 아마미야 루카."
그는 따라 부르지 않았다. 왜 '지'였냐고도 묻지 않았다. 대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흠."
이름 대신 헛기침이었다. 엄지가 허리춤의 포케벨을 한 번 문질렀다. 그리고 신호등 불빛 아래서 앞머리 그늘이 아래로 기울었다. 내 얼굴 쪽이 아니었다. 내 허리춤, 반쯤 뒤집혀 하트 스티커 붙은 뒷면을 내보이던 분홍 포케벨 쪽이었다. 한 박자 그대로 있다가 그늘은 다시 차도 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루즈삭스, 쇼핑백, 어깨들이 우르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무겐 애들이 오토바이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먼저 가."
마코토가 헬멧을 들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네? 헤드는요? 헤드 혼자 두고 가면 제가 애들한테 뭐라고…"
"가."
마코토는 입을 다물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가지 않았다. 신호등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얼굴은 반쯤 돌린 채로.
한 박자. 두 박자.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밤에."
차도 쪽을 본 채였다. 아까 한 말을 한 번 더 한 거였다. 모든 걸 한마디로 끝내는 사람이 한 박자 늦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통역하면… 통역이 안 됐다. 그냥 심장이 쿵 했다.
"루카찡!!"
거리 저쪽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내가 그쪽을 돌아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벌써 길 건너에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비명의 주인은 내 팔짱을 끼더니 거의 끌다시피 나를 데려갔다. 패밀리 레스토랑 창가의 네 자리,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테이블. 여기가 갸루 서클 하니비의 회의실이란다.
"루카찡! 들었어? 무겐 헤드가 '하니비 건드리지 마' 했대! 벌써 센터가이에 다 돌았어!"
거리 소문, 높음. 나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쪽지가 그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근데 그다음에 뭐랬는 줄 알아? 아무 말도 안 했대! 그냥 서 있었대! 완전 초베리쿨이잖아!"
나는 웃으려다 말았다. 아무 말도 안 한 게 아니었다. 밤에, 라고 했다. 두 번이나. 그건 이 거리 소문 어디에도 없었다. 나만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신고식 특훈 오늘부터잖아! 근데 너 이거, 루즈삭스! 각도가 틀렸잖아!"
그 애가 가방에서 30센치 자를 꺼냈다. 진짜 자였다. 내 발치에 쭈그려 앉아 양말 주름에 자를 대고, 미간에 주름까지 잡았다.
"봐! 초베리굿까지 3센치 모자라잖아! 3센치면 하니비 망해!"
생사가 걸린 얼굴이었다. 나는 메뉴판으로 입을 가렸다가, 그만 입이 샜다.
"아, 이거? 이거 나중에 다시 유행해. 2020년대에 Y2K 감성으로 완전 돌아와서…"
맞은편에서 컵을 탁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아유, 고마 일어나라."
자를 든 애가 입을 삐죽 내밀고 일어났다. 아유. 하니비 리더라는 건 오 분 만에 본인 입으로 세 번 들었다.
컵을 내려놓은 애는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나를 봤다.
"니 말투 와 그라노."
"치나츠, 또 그런다!"
치나츠는 아유 말을 듣지 않고 테이블 위로 몸을 숙였다.
"됐고. 하나만 묻자. 니랑 내랑 처음 프리쿠라 찍은 날. 그기 언제였노."
망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 그거 나 알아. 그거… 봄이었지. 봄. 초베리 봄."
"봄 언제고."
치나츠의 목소리가 한 칸 낮아지고 한 박자 느려졌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 흘렀다. 그때 옆자리에서 수첩 넘기는 소리가 났다.
"…4월 2일이요."
맨 끝자리 막내가 프리쿠라가 덕지덕지 붙은 수첩을 펴 들고 있었다. 다른 말은 다 끝이 흐렸는데, 날짜를 읽을 때만 목소리가 또렷했다.
"루카 선배랑 치나츠 선배, 109 앞 기계에서요. 적어 뒀어요. …맞죠, 루카 선배?"
"어, 어. 4월 2일. 맞아."
"역시 모모! 모모 수첩은 하니비 보물이잖아!"
치나츠는 한참 나를 보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웃기고 있네." 그러고는 빨대를 씹으면서 계속 나를 봤다. 의심을 접은 얼굴이 아니었다. 잠깐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화장실 앞에서 모모가 나를 따라와 수첩 맨 뒷장을 펴 보였다.
"루카 선배, 요즘 자꾸 깜빡하죠? 그래서… 이거요. 포케벨은 소리로 읽는 거예요."
맨 위에 0840, 오하요가 동글동글한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신호등 아래서 내 입으로 이어 붙였던 그 소리였다. 그 아래로 4649. 요, 로, 시, 쿠. 잘 부탁해.
"그리고 텔레폰카드는 아껴 써요. 카드에 찍힌 숫자, 그게 도수예요. 남은 만큼만 보낼 수 있어요. …까먹은 거 있으면 저한테 물어봐요. 제가 적어 둘게요. 진짜요."
이 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누가 내 편에 섰다. 루카 편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내 편에.
밤의 하치코 출구. 녹색 공중전화 앞에 줄이 길었다. 다들 휴대폰으로 갈아탔다는데, 숫자를 보내려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 모여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하치코, 공중전화. 그 사람이 말한 그대로의 자리였다.
내 앞의 여고생은 십 분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누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들고, 또 눌렀다. 저 숫자를 받을 누군가가 조금 부러웠다.
차례가 왔다. 카드를 밀어 넣자 작은 화면에 50이 떴다. 모모가 말한 도수였다. 수화기에서 쇠 냄새가 났다. 쪽지의 열 자리를 누르는 동안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쳐. 밤에.
삐, 신호음. 이제부터 누르는 숫자가 그 사람 액정에 뜬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려고 했다. 8, 2, 8, 2. 빨리빨리. 엄마가 삐삐 시절 얘기를 할 때마다 꺼내던 숫자였다. 혼자 픽 웃음이 났다. 이 거리엔 이걸 읽을 사람이 없다. 모모 수첩에도 없었다.
8을 누르기 직전에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다른 숫자를 눌렀다.
제로. 하치. 욘. 제로.
오, 하, 요오. 그 사람 번호 끝에 붙어 있던 네 자리를, 그 사람한테 돌려보냈다.
마지막에 샵을 두 번 눌렀다. 삐.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루카라고 해야 할지 지유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화면의 50이 49로 내려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던 손이 멈췄다.
꿈속 금 간 액정에 켜져 있던 네 자리. 제로, 하치, 욘, 제로. 방금 내 손가락이 누른 그 숫자였다.
빗속에 엎어진 그의 포케벨이 울리던 그 밤에도, 이 숫자를 보낸 게… 나였을까.
수화기를 걸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돌아서는데 줄 맨 끝, 코트 자락들 사이로 검은 워커 앞코가 언뜻 보였다. 흙탕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고개를 빼 봤을 때는 겨울 코트들뿐이었다. 이 거리에 검은 워커가 한둘일까. 그런데도 심장이 먼저 뛰었다.
"아마미야 씨."
등 뒤에서였다. 아, 마, 미, 야. 한 음절씩 공들여 부르는 목소리였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웃고 있었다. 온 거리가 젖어 있는데 구두 끝에는 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다.
"팀 제로의 헤드, 우시오 카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무겐 헤드께 번호를 받으셨다지요."
숨이 멎었다. 겨우 몇 시간 전 일이었다. 그 골목에도, 그 신호등 아래에도 이런 얼굴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접수되었습니다."
"…뭐가요?"
"오늘 오후, 무겐 쪽에 항쟁 신청서를 팩스로 보내 드렸습니다. 밀레니엄 밤의 센터가이를 걸고요." 그는 문장을 끝까지 또박또박 맺었다. 목소리는 한 번도 높아지지 않았다. "패한 쪽은 이 거리에서 물러납니다. 기한은 31일 자정입니다."
"그게 저랑 무슨…"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눈앞에 초록 화면이 다시 켜졌다. 이번엔 한 줄뿐이었다.
[세기말까지 남은 날: 30]
"좋은 밤 되십시오."
우시오 카이는 인사까지 깍듯하게 마치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접수되었다는 게 신청서였는지 나였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허리춤의 분홍 포케벨을 내려다봤다. 나도 모르게 엄지로 액정을 문질렀다.
액정은 어두웠다.
밤에, 라고 그 사람은 두 번 말했다. 밤은 왔고, 내 포케벨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