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칼
"…방금 망설였지? 내가 대신 해 줄까?"
바위에서 내려오는 비탈 중간이었다. 목소리는 왼쪽 위 삼나무 가지에서 났다.
"기리마루."
달콤한 목소리는 꺼내지 않았다. 저놈은 열 살 때부터 그게 연기라는 걸 알았다.
"오랜만이다, 이가 여우."
가지가 한 번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낙엽 밟는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산 하나 건너 고가 놈들은 원래 그렇게 내려앉는다.
"다 봤어?"
"삼나무 위에서 다 봤지. 첫날 밤도, 오늘 밤도. 그 텐구가 네 손을 잡았을 때 말이야. 너 칼 안 뽑더라. 손만 잡혀 있었어. 한참."
"한참 아니야. 한 박자였어."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기리마루가 낮게 웃었다.
"거 봐, 셌네."
네 걸음 떨어져 있었다. 칼을 던지면 닿는 거리다. 나는 들숨 넷, 날숨 넷으로 숨을 골랐다.
"열두 살 때 개울가에서 숨 참기 하면, 넌 한 번도 안 졌지. 근데 아까는 숨을 쉬더라. 그 텐구 옆에서. 아주 고르게."
"잠든 척이었어."
"잠든 척하는 숨이랑 진짜 잠든 숨은 다르지. 그건 네가 나한테 가르쳐 준 거잖아."
옛날얘기를 꺼낼 때 저놈 목소리는 다정해진다. 다정해질수록 위험해진다. 침을 삼켰다. 그 소리도 저놈은 들었을 것이다.
"도겐이 보냈어?"
"누구?"
모르는 척하는 숨이 아니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숨이었다.
"카게로."
별명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숨에서 웃음기가 빠져 있었다.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안 틀린 이가의 카게로가, 이틀째 같은 목을 못 따고 있어. 비녀는 뽑지도 못했고, 단도는 한 뼘 빗나갔지. 고가에서도 다 알아. 너답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묻잖아. 내가 대신 해 줄까?"
우는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였다. 그 밑에 칼이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세 걸음. 한 번 뛰면 닿는 거리다.
"내 일이야."
"그래?"
"손대지 마."
"그럼 해 봐. 이가 여우는 원래 단숨에 끝내잖아. 그믐 전까지 못 하면… 그땐 내 차례고."
한 박자 쉬고, 저놈이 다정하게 덧붙였다.
"난 너처럼 품에 안 파고들어. 목만 가져가지."
저놈 차례가 오면 그건 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리마루가 물러섰다. 이번에도 낙엽 소리는 없었다. 대신 숨이 다섯 걸음, 열 걸음, 스무 걸음 멀어지는 게 다 들렸다. 일부러 들려주는 숨이었다. 언제든 다시 온다는 뜻이었다.
고가 놈의 숨은 스무 걸음 밖에서도 다 들린다. 그런데 바위 위 그 사내의 숨은, 가슴에 귀를 대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자지 않았다.
삼나무 뿌리 사이에 등을 붙이고 앉아 셌다. 버릇이다.
비녀. 단도. 가면 턱에 닿은 손끝. 세 번 다 색술이었다. 품에 파고들어 읽고, 가장 방심한 순간에 끝내는 술이다. 속지 않는 상대 앞에서 색술은 그냥 재롱이다.
귀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하나 있었다. "무엇이 있기를 바라느냐." 대답을 고르는 사이에 동쪽 하늘이 먹물에 물 한 방울 떨군 만큼 묽어졌다.
나는 일어나 머리의 비녀를 한 번 만졌다. 꽂힌 채로 두었다. 소매 속 단도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는다.
바위로 오르는 길에 서리가 내려 하얬다.
디딜 때마다 얼어붙은 이끼가 사각사각 부서졌다. 밤새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한 삼나무 껍질 냄새가 차갑게 코를 찔렀다. 이번엔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 숨도 죽이지 않았다. 발소리를 다 내며 올라갔다.
그는 바위에 앉아 있었다. 붉은 옻칠 가면, 무릎 위의 깃털 부채, 등 뒤에 접힌 검은 날개. 날개 끝에 서리가 엷게 앉아 있었다. 내가 내려간 뒤로 밤새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짤랑. 가슴께 매듭의 놋방울이 울렸다.
바위 끝에 손을 걸었을 때,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먼저 말했다.
"발소리를 내는구나."
"숨기지 않기로 했어요."
"무엇을."
나는 바위 위로 올라서서 단도를 들어 보였다. 능선에서 번진 새벽빛이 칼날 끝에 한 줄 걸렸다.
"자객이 칼을 보이며 오는구나."
꾸짖는 말도 비웃는 말도 아니었다. 산에 눈이 오는구나, 하는 것과 같은 온도였다.
"숨긴 칼은 다 들켰잖아요."
"그래서, 보이는 칼이냐."
"네. 이건 들킬 게 없으니까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리."
내 귀에도 낯선 목소리였다. 늘이지도, 끝을 올리지도 않았다. 구로바한테 "고마워요" 할 때 나온 목소리. 달콤함을 다 걷어 낸 존대였다.
나는 그와 눈높이가 같아질 때까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칼끝을 그의 목에 댔다. 가면 턱 바로 아래, 옷깃과 가면 사이로 드러난 목이었다. 칼끝이 살갗에 닿았다. 서리만큼 찼다.
목까지, 없다.
세 뼘도, 두 뼘도, 한 뼘도 아니었다.
"숨이 이르다."
그제야 알았다. 칼끝이 닿는 순간 내 숨이 멎어 있었다. 열한 해 버릇이 저 혼자 먼저 나간 것이다. 나는 이를 물고 숨을 도로 내쉬었다. 입김이 칼날에 하얗게 서렸다.
"이번엔 들켜도 상관없어요."
"들켜도 되는 칼이냐."
목구멍이 한 번 막혔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가면, 벗어요."
가면을 벗기려면 칼 쥔 손을 떼야 한다. 칼이 목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 거리는 끝난다. 그러니 벗는 건 그여야 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내 손목을 잡지도, 부채를 들지도 않았다. 칼끝이 목에 닿아 있는데 고개 한 번 젖히지 않았다.
"벗기면, 무엇을 하려느냐."
"…보려고요."
"보고 나면."
그다음은 부채였다. 그다음은 품 깊이 넣어 둔 일곱 장이었다. 입이 거기서 멎었다. 간밤에 대답 못 한 물음이 모양만 바꿔 다시 와 있었다.
"말이 끊겼구나."
"보고 나면… 보는 거죠."
"그뿐이냐."
첫날 밤 바위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말이 어디서 끊기는지를 들었다.
짤랑.
방울이 울렸다. 그 떨림이 칼끝으로 가늘게 전해져, 단도를 타고 내 손바닥까지 왔다. 고르다. 칼이 목에 닿아 있는데도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입김은 하얗게 피는데, 그의 가면 밑으로는 김 한 줄기 오르지 않았다. 숨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방울만 울었다.
"벗으라고요."
"……."
"이번엔 연기 안 해요. 길 잃은 척도, 잠든 척도 안 해요. 칼은 여기 있어요. 보이죠?"
가면의 눈구멍이 천천히 올라왔다. 초록빛이 도는 연갈색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새벽빛이 들어 첫날 밤보다 잘 보였다. 그 눈은 칼을 보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보인다."
그 눈이 한 번, 칼 쥔 내 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엄지에 힘이 들었구나."
"……."
"그래서는 날이 운다."
제 목에 닿은 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무뿌리 길에서 내 왼발을 짚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가르치지 마세요. 지금은."
"베는 법을 배우러 온 것 아니었느냐."
첫날 밤, 이 바위 위. 날 베러 왔느냐. 그럼 베는 법부터 제대로 배우거라. 그때 한 말을 그는 지금 제 목 위에서 거두고 있었다.
"베러 온 거예요."
"그럼, 날이 누웠다."
한 박자.
"그래서는 목이 아니라 옷깃을 벤다."
나도 모르게 손목이 돌았다. 열한 해 몸에 밴 것이 내 말보다 먼저 그의 말을 들었다.
"다시."
또 돌렸다. 날이 섰다. 그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잡힐 때까지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날 끝이 그의 목에 바로 선 다음에야 목소리가 왔다.
"그대로 두거라."
"…나리 목에요?"
"네 칼이다."
"제 칼이니까, 제가 정해요."
"그럼 정하거라."
기가 막혔다. 제 목을 겨눈 칼을 고쳐 주고, 그대로 두라는 표적이 어디 있나. 고쳐 준 대로 고쳐 쥐는 자객은 또 어디 있나.
손이 조금 떨렸다. 날 끝으로 그것도 건너갔을 것이다.
"움켜쥐지 말고, 얹거라."
"떠는 거 아니에요. 추워서예요."
"추우냐."
그뿐이었다. 그 두 마디가 칼날보다 차게 손등에 내려앉았다.
"…밤새 밖에 있었으니까요."
말하면서 그의 날개 끝을 봤다. 밤새 앉은 서리가 하얬다.
"나리야말로 밤새 여기 계셨잖아요."
"그리 보이느냐."
그 말과 함께 날개 끝이 아주 조금 접혔다. 서리 한 줌이 소리 없이 바위로 미끄러졌다. 밤새 꼼짝 않던 날개가, 내가 그걸 짚은 바로 그때 움직였다.
물으면 늘 묻는 말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엔 말보다 날개가 먼저 대답했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본 채 셈을 했다. 칼끝을 한 치만 밀면 끝난다. 그런데 도겐이 산 건 그의 잠이다. 목이 아니다. 잠드시면이었지, 죽으시면이 아니었다. 주검을 들고 가면 거래는 없다. 이 칼은 처음부터 목을 쥐어 두는 칼이었다. 그을 수는 없는 칼. 그걸 아는 건 나뿐이다. 나뿐이어야 한다.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밀지 못할 칼을 밀 것처럼.
"무릎이 바위를 밀고 있구나."
셈이 끝나는 바로 그 자리에 그의 목소리가 놓였다.
"그래서는 한 치를 못 민다."
한 치. 방금 내가 속으로 잰 바로 그 한 치였다.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한 박자 뒤.
"…벨 수 없는 칼이구나."
낮고 느렸다. 칼끝이 목에 닿은 그대로였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칼 쥔 손바닥이 식었다. 어떻게.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짚는 말투였다. "숨이 이르다." 하던 것과 똑같은 온도였다.
"무슨 소리예요."
대답도 되물음도 없었다. 가면 너머 눈이 천천히 내려가, 칼 쥔 내 손목에 멎었다.
"손목은 괜찮으냐."
걱정인지 경고인지 모를 온도였다. 그 한마디에 손목이 먼저 기억해 냈다. 한 치도 못 움직이게 하면서 아프게는 하지 않던 힘. 그 힘이면 첫날부터, 언제든 이 뼈를 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안 죽였다. 내 칼이 목에 닿아 있는 지금도.
간밤에 목에 걸려 삼켰던 말이, 이번에는 걸리지 않았다.
"왜 날 안 죽여요?"
달콤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조금 떨렸다.
"첫날부터 죽일 수 있었잖아요. 내가 뭘 하러 왔는지도 알잖아요. 그런데 왜 무릎을 꿇어요. 왜 가르쳐요. 왜 지금도 내 칼을 고쳐 줘요?"
말을 다 쏟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이 칼날 위로 흩어졌다.
"다 물었느냐."
"……."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나무뿌리 길에서 내가 자세를 다 잡을 때까지 기다리던 것처럼.
동쪽 능선 위로 빛이 한 줄 그어졌다. 그 빛을 받은 삼나무 우듬지가 끝에서부터 검푸르게 살아났다. 어디선가 이른 새가 한 번 울었다.
그리고 들렸다. 등 뒤, 스무 걸음쯤 아래 삼나무 숲에서. 느리고 긴 숨. 일부러 들려주는 숨이었다.
그믐 전까지 못 하면, 그땐 내 차례고. 저 숨의 차례가 오면, 이 목은 잠들지 않는다. 그 숨이 보는 앞에서 내 칼은 그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면은 숲 쪽으로 돌지 않았다. 그 눈은 나만 보고 있었다.
날개 끝에 남은 서리가 빛을 받아 아주 작게 반짝였다.
짤랑.
방울이 울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았다. 방울 소리 밑으로 가라앉을 만큼.
"그럼 너는."
가면 너머 눈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왜 아직 긋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그가 움직였다. 이 바위에 오른 뒤 처음이었다. 목을 칼끝 쪽으로 한 터럭 기대 왔다.
날이 살갗을 눌렀다. 그가 고쳐 준 대로 선 날이었다. 짤랑. 방울은 여전히 고르게 울었다.
내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한 터럭 뒤로. 입은 아직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는데.
칼끝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기대 온 만큼 내가 물러났을 뿐이다. 목까지는 여전히, 없다.
대답할 말을 찾았다. 거래가 있어서. 도겐이 원한 건 잠이라서. 스무 명이 있어서. 다 맞는 말이었다. 다 맞는데,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칼을 밀지도 거두지도 못했다. 등 뒤 숲에서는 그 긴 숨이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짤랑. 하나. 짤랑. 둘.
셋을 세다가, 셈을 놓쳤다.
초록빛 도는 눈이, 기다렸다.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