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어요
달이 없는 밤이었다. 동짓달 그믐.
쿠라마산 삼나무 숲 꼭대기, 이끼 낀 바위 위에 그가 앉아 있었다. 붉은 옻칠 가면을 쓰고, 깃털 부채를 무릎에 얹은 채였다. 등 뒤에 접힌 검은 날개는 밤보다 한 겹 더 검었다.
쿠라마의 주인, 대텐구 소조보. 오늘 밤 내가 목을 딸 사내다.
나는 바위 아래에서 일부러 발을 헛디뎠다. 젖은 삼나무 껍질 냄새가 코끝에 확 끼쳤다.
"아… 길을 잃었어요…"
어미는 길게 늘이고, 끝은 살짝 올린다. 제일 잘 먹히는 목소리다. 바위를 기어오르다 비틀거리는 척하며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는 받아 주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나는 앉아 있는 그의 무릎 위로 반쯤 엎어졌다. 뺨이 닿은 곳은 가슴 아래, 허리띠 바로 위였다. 옷자락에서 찬 바람 냄새가 났다. 사람 냄새가 아니었다.
내 비녀에서 그의 목까지, 세 뼘.
이 거리에서 나는 늘 숨을 듣는다. 품에 여자가 들면 사내의 숨은 반 박자 빨라졌다가 길게 늘어진다. 늘어지는 그 숨 끝이 방심이고, 거기서 끝낸다.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귀였다.
그런데 들리지 않았다.
귀가 그의 몸에 닿아 있는데도 빨라지는 숨도, 늘어지는 숨도 없었다. 대신 귀 바로 위, 가슴께 매듭에 달린 작은 놋방울이 아주 가늘게 짤랑 울렸다. 숨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방울이 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귀를 그 매듭 곁에 댔다. 두 뼘.
괜찮아. 숨이 안 들리면 방울을 세면 돼.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한 뼘.
나는 숨을 멈췄다. 이가의 술은 거기서 시작한다. 숨을 멈추고, 끝낸다. 손이 머리로 올라가 비녀를 쥐었다.
뽑지 못했다.
손목이 잡혀 있었다. 언제 잡혔는지도 몰랐다. 꽉 쥔 것도 아닌데 팔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른 나무처럼 따뜻한 손이었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숨이 이르다."
낮고 느린 목소리였다. 가면 너머에서,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그래서는 들킨다. 숨이 멎으면 어깨가 먼저 선다. 비녀는 그다음이고."
내 어깨가 먼저 섰다는 말이었다. 나는 웃음을 얹었다. 연기는 들킨 다음에도 이어 가는 거니까.
"어머… 나리, 아파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냥 길을…"
"길을 잃은 자는 산을 내려가지, 꼭대기로 오르지 않는다."
내 첫마디를 그대로 되받은 말이었다. 이 바위 위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와 나뿐이다.
그가 일어섰다. 내 손목을 쥔 채 나까지 바위 위에 일으켜 세웠다.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눈이 보였다. 초록빛이 도는 연갈색 눈. 그 눈은 내 비녀도, 잡힌 손도 보지 않았다. 나만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천천히 낮아졌다.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가, 그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 손목을 쥔 채로.
텐구가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건 제자를 받을 때뿐이라고, 이가 노인들이 그랬다.
"날 베러 왔느냐."
한 박자 쉬고.
"그럼 베는 법부터 제대로 배우거라."
누구냐고는 묻지 않았다. 어디서 왔느냐고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달콤하게.
"제자요…? 저 같은 걸요?"
"너 같은 것이 무엇이냐."
말문이 막혔다. 떠오르는 대답이 다 거짓이라 고를 수가 없었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들켰네."
낮게, 혼잣말로. 그러고는 바로 셈을 했다. 제자가 되면 날마다 곁에 있게 된다. 이 산에서 이 사내의 목에 가장 가까이 가는 사람이 된다.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달콤한 목소리가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그럼… 가르쳐 주세요, 나리."
그가 손목을 놓았다. 비녀는 아직 내 머리에 꽂혀 있었다.
"새벽에, 나무뿌리 길로 오거라."
한 박자.
"이번엔 길을 잃지 말고."
나는 바위를 내려왔다. 몇 걸음 가서 돌아봤다. 그는 어느새 처음처럼 앉아 부채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내가 숲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삼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눈앞에 낡은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어릴 때부터 꿈에서만 보던 두루마리였다. 꿈에서는 늘 표적의 숨이 거기 적혀 있었다.
"뭐야, 이게… 눈 뜨고 있는데, 왜 보여?"
어둠 위로 먹 글씨가 떠올랐다. 섣달 그믐까지, 스물아홉 밤. 그 아래 표적의 숨을 적는 칸은 비어 있었다. 꿈에서는 한 번도 비어 있던 적이 없는 칸이었다.
오늘이 동짓달 그믐이니, 다음 그믐까지다. 섣달 그믐밤. 도겐, 그 웃는 음양사가 이 산에 불을 놓겠다는 밤이다.
그 바위에 오르기 전, 그날 저녁.
나는 산 아래 오다군 진영의 막사에 있었다. 이가가 불탄 지 한 달, 오다라는 장수의 군대는 남은 마을을 마저 태우는 중이었다. 휘장 틈으로 내가 나고 자란 지붕들이 타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음양사 가모노 도겐은 웃는 얼굴로 상 위에 종이를 한 장씩 내려놓았다. 사락, 사락.
"하나. 둘. 셋."
부적이었다. 먹이 덜 말라 냄새가 진했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일곱 장입니다, 카게로 님."
그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맨얼굴."
또 하나.
"깃털 부채."
그리고 부적 위에 손을 얹었다.
"그분의 맨얼굴을 본 분이, 그분의 부채를 쥐고, 이것을 붙이시면. 그분은 천 년을 주무십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그냥 종이고요."
열린 휘장 너머로 말뚝이 늘어서 있었다. 말뚝마다 이가 사람이 묶여 있었다. 세지 않으려 했는데 버릇이 먼저 셌다. 스무 명.
"스무 분입니다."
도겐이 내 눈길을 따라 휘장 밖을 보며 말했다.
"세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다시 나를 보고 웃었다.
"섣달 그믐밤, 제가 산에 불을 놓기 전에 산의 주인이 잠드시면 불은 산문에서 멈춥니다. 저분들도 풀려나시고요. 약속은 지킵니다."
그가 부적을 가지런히 모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혹시 산에서 길을 잃으셔도 걱정은 마십시오. 찾아 드릴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길 잃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믐까지 스물아홉 밤 남았습니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요?"
사람 스무 명을 세는 동안에도 그의 숨은 고르기만 했다.
셋을 다 갖추려면 먼저 목을 쥐어야 한다. 칼끝을 목에 대 두면 누구든 꼼짝 못 한다. 이번 일에서 끝낸다는 건, 봉인이다.
나는 부적을 품에 넣었다. 그때부터 내 품에서는 먹 냄새가 났다.
새벽 나무뿌리 길은 얼음장 같았다.
그는 길 끝에 서 있었다. 가면 밑으로 김 한 줄기 피어오르지 않았다. 부채는 손에 쥔 채였다. 봉인의 두 번째 조건이 저 손에 있었다.
"삼나무가 제 뿌리로 짠 길이다."
그가 발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뿌리마다 젖은 이끼가 미끈거렸다.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미끄러지는 건 늘 건너는 쪽이지."
"뭘 배우는 건데요, 나리?"
"건너는 것."
"건너면요?"
"다시 건너는 것."
그러고는 한마디를 보탰다.
"단숨에 건너오거라."
간단했다. 숨을 멈추고 건너면 된다. 나는 숨을 멈췄고, 세 걸음 만에 발이 굳었다. 뿌리 위에서 몸이 기우뚱했다.
"다시."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내가 처음 자리로 돌아가 자세를 다 바로잡을 때까지 바람이 우듬지를 쓸고 가는 소리만 났다.
두 번째도 굳었다. 세 번째에 나는 셈을 바꿨다.
일부러 미끄러지는 척하며 소매 속 단도를 그의 목으로 쳐올렸다. 간밤의 비녀에 이어, 두 번째 칼이었다.
그는 막지도 비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칼끝은 목에 한 뼘 못 미쳐 허공을 갈랐다. 굳은 왼발이 이끼 위에서 미끄러졌고, 나는 뿌리 사이에 무릎을 찧었다. 그는 처음 서 있던 자리 그대로였다.
"왼발이 먼저 굳었구나."
한 박자.
"숨이 이르다."
이 사내는 내가 칼을 뽑을 걸 알았다. 그런데도 비키지 않았다. 되받아 베지도 않았다.
"칼보다 숨이 먼저 나갔구나. 그러니 목이 멀어졌다."
제 목을 노린 칼을, 그는 틀린 자세처럼 짚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음엔 안 빗나가요."
"그럼,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그의 눈길이 등에 닿았다. 나는 돌아서서 웃었다. 숨이 안 들리면 말을 시키면 된다. 사람은 말에서도 샌다.
"나리는 왜 가면을 쓰세요?"
"왜 묻느냐."
"궁금해서요."
"궁금한 것이 가면뿐이냐."
웃음이 입가에서 굳었다. 묻는 건 나였는데, 대답을 고르고 있는 것도 나였다.
그가 엉킨 뿌리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흘렸다.
"…오백 년 전에도 그랬지."
그 말을 하는 동안만은 그가 나를 보지 않았다. 부채를 쥔 손가락이 깃대를 따라 한 번, 천천히 내려갔다.
"네? 뭐가요, 나리?"
대답은 없었다. 그는 내가 자세를 다 잡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이번엔 숨을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화가 나서, 멈출 틈도 없이 그냥 건넜다. 발이 굳지 않았다. 뿌리가 발바닥 밑으로 저절로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길 끝, 그의 앞이었다.
그때 뭔가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검은 깃털 하나였다. 그의 날개에서 빠진 깃털이 내 발치 이끼 위에 내려앉았다. 털갈이 철인가. 나는 그렇게 넘겼다.
"…이번엔요?"
"네 발이 무어라 하더냐."
칭찬은 없었다. 내 발은, 숨을 멈추지 않으니까 건너졌다고 했다. 열한 해 동안 숨을 멈추는 데서 모든 걸 시작했는데.
"주인님! 주인님!"
삼나무 사이로 장작을 한 아름 안은 사내가 뛰어나왔다. 등에 검은 날개가 달린 까마귀 텐구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장작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 여자 수상해요! 까악, 수상하다니까요, 주인님! 간밤에 바위에서 뭘 했는지 제가 다 봤…"
"구로바."
이름 한 번에 까마귀가 입을 다물었다. 투덜투덜 장작을 내려놓더니, 품에서 대나무 잎에 싼 걸 꺼내 나한테 쑥 내밀었다.
"자객 아가씨, 이거요. 주먹밥이요. 주인님이 주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냥 남아서요!"
"…고마워요."
"주인님은 원래 그래요. 아무나 막 들이고. 까악."
가면은 주먹밥 쪽으로 돌지도 않았다. 주먹밥은 아직 따뜻했다. 남은 밥이 이렇게 따뜻할 리 없다.
그때 바람이 방향을 틀어 연기 냄새를 실어 왔다. 산 아래 진영의 매캐한 냄새가 아니었다. 밥 짓는 연기에 가까웠다. 이 산 어딘가에 사람이 있었다.
나는 주먹밥을 쥔 채 연기 쪽으로 걸었다. 구로바가 "어디 가요, 자객 아가씨!" 하고 외쳤다. 그 소리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등에 닿았다.
"그쪽으로 가려거든, 숨을 멈추지 말거라."
붙잡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연기는 좁은 골짜기 안쪽, 숯 굽던 사람들이 버린 움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묽은 조죽 끓는 냄새가 났다.
"누님! 누님!"
맨발의 사내애가 달려왔다. 그을린 소매, 귀에 익은 산골 말투였다.
"카게로 누님 맞죠? 저 진타예요! 누님도 살아 계셨네, 진짜로!"
"진타…? 너, 살아 있었구나…"
"산님이 여기 있으라고 하셨어요! 밤마다 산문까지 내려가 보신대요. 오다 놈들은 그 문을 못 넘는대요!"
빠르고 들뜬, 거짓이 하나도 없는 숨이었다. 숯막 안팎에서 마른 얼굴들이 이가 말을 하고 있었다. 불타던 밤 산을 넘어 온 사람들이었다. 말뚝의 스무 명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숨은 곳이 하필 이 산이었다.
"킁."
문가에서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내 어깨 가까이 코를 댔다.
"하치베 할아범이에요! …할아범? 누님 냄새는 왜 맡아요?"
노인은 진타에게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한테만 들리게 낮게 말했다.
"그 부적 냄새, 이 코가 모를 줄 알고?"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품속의 먹 냄새. 일곱 장.
노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가다가, 등을 보인 채로 한마디를 더 뱉었다.
"산님께서 받으셨으면 된 거여."
노인의 등 너머, 골짜기 위로 뻗은 삼나무 가지에 검은 깃털 하나가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 길에서 내 발치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검은빛이었다. 그는 여기 없는데, 여기에도 있었다.
갈 곳 없던 이가 사람들을 받아 준 건 그 사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내를 천 년 동안 재우러 왔다.
봉인하면 불은 산문에서 멈추고, 스무 명은 풀려나고, 이 숯막도 타지 않는다. 셈은 다 맞는데, 품속 부적 일곱 장이 갑자기 무거워 숨이 내려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들은 말이 귀에 다시 걸렸다. "숨을 멈추지 말거라."
셈에 넣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그가 잠들면, 이 산에 사람들을 숨겨 주던 것도 같이 잠든다. 불이 멈춘 산에서, 숨은 사람들은 누구 품에 남나.
주먹밥은 아직 따뜻했다. 문가에서 손가락을 빨던 아이에게 그걸 쥐여 주고, 나는 숯막을 먼저 떠났다. 등 뒤에서 진타가 "또 오세요, 누님!" 하고 손을 흔들었다. 골짜기를 나서며 올려다본 산꼭대기는 삼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거기 앉아 있다는 건 알았다.
밤이 되자 나는 다시 바위로 올라갔다.
그는 간밤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바위 끝에 손을 걸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무엇을 보았느냐."
내가 낮 동안 산을 돌아다녔다는 걸 아는 물음이었다. 나는 목소리에 꿀을 발랐다.
"밥 짓는 연기요…"
"그뿐이냐."
"…그뿐이에요."
한 박자.
"그럼 그뿐이구나."
모르는 척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곁으로 기어올라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리… 여기서 조금만 쉬어도 돼요? 발이 너무 시려서요…"
"쉬러 왔느냐."
"네에…"
"그럼 쉬거라."
나는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이끼 낀 바위의 찬기가 등으로 스며들었다.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고르게. 잠든 사람의 숨을 흉내 내는 건 쉽다.
봉인의 첫 조건은 맨얼굴이다.
방울 소리를 셌다. 삼백을 넘겼을 때 손을 뻗었다. 잠결에 뒤척이는 척. 손끝이 가면 턱에 닿았다. 옻칠이 차갑고 매끄러웠다. 손톱 하나만 걸면 들린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손목이 아니었다. 손이었다. 그는 내 손을 가면에서 떼어 조용히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손가락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
그 한 박자 동안 방울이 울리지 않았다. 밤새 짤랑거리던 가슴께의 놋방울이 멎어 있었다.
하나. 둘.
짤랑. 방울이 다시 울렸다.
'왜 안 죽여요?'
그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걸 삼키고 다른 걸 물었다. 눈은 감은 채로.
"…그 가면 안엔, 뭐가 있어요?"
대답이 늦었다. 목소리도 아까보다 반음 낮았다.
"무엇이 있기를 바라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동안에도 내 숨은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지 않았다.
방울은 그의 숨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울린다. 그 방울이 멎었다. 그럼 아까 그 한 박자 동안 숨을 참은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나는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바위를 내려가는데, 등 뒤에서 그가 말했다.
"새벽에."
그뿐이었다. 가면을 벗기려던 밤에도 수련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 손가락이 닿았던 손등이 이상하게 오래 따가웠다. 찬 바위에 너무 오래 대고 있던 탓이다.
두루마리가 다시 떠올랐다. 밤이 하나 줄어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스물여덟."
그 아래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바위 아래 삼나무 숲은 먹을 쏟은 것처럼 캄캄했다. 그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하고,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이가 여우."
발이 멈췄다.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다. 산 하나 건너 고가, 그 닌자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나랑 칼을 겨루며 자란 놈. 기리마루.
찾아 드릴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도겐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감겼다.
어둠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느긋했다. 한자리에서 오래 기다린 사람의 숨이었다. 이 사내의 숨은 아주 잘 들렸다. 저 위의 숨은 끝내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데.
"가면에 손까지 대 놓고."
웃음 섞인 숨이 한 번 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손이 비녀가 아니라, 아직 따가운 손등을 감싸 쥐고 있었다. 저놈의 숨을 세려고 귀를 기울였는데, 세어지지 않았다. 내 숨이 멎어 있었다. 왜 멈췄는지, 처음으로 몰랐다.
"방금 망설였지? 내가 대신 해 줄까?"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