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한 줌의 하루
둘.
어깨가 먼저 안다. 발톱이 파고들던 자리가 가볍다. 외투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어 본다. 구멍이 없다. 흰 깃털 한 올도 붙어 있지 않다.
셋.
되감겼다. 여덟 번째 새벽이다. 셋째 나무에 감아 둔 삼끈도, 두 번 지은 매듭도 없을 것이다. 알면서도 본다. 역시 없다.
장부를 꺼낸다. 일곱째 장 맨 아래에 어젯밤 적은 줄이 그대로 있다.
이름은 내가 먼저 불렀다. 그녀가 칼보다 먼저 눈을 들었다. 숨 한 번만큼, 대답이 늦었다.
어젯밤엔 손이 얼어서 다 적지 못했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는다.
까마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세 번이 아니고 두 번.
누구 목소리를 닮았는지는 적지 않는다. 적으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다.
여덟째 장을 편다. 머리엔 같은 날짜를, 맨 윗줄엔 같은 이름을 적는다.
미콜라. 사냥꾼. 셋째 나무 밑. 얼어 죽음.
오른쪽 맨 아래에 손이 먼저 칸을 긋는다. 값. 이번에도 비어 있다.
일곱 번 다 같은 길로 갔다. 야리나 부엌에 들렀다가 초소로 갔고, 그때마다 미콜라는 이미 손을 들고 소금을 받은 뒤였다. 오늘은 길을 바꾼다.
일어나서 뼈 표식 줄 바로 앞까지 걸어간다. 눈에 반쯤 묻힌 하얀 뼈들이 장화 코앞에 한 줄로 누워 있다. 거기 서서 기다린다.
숲 쪽에서 그녀가 걸어 나온다. 눈 밟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늘 서던 자리, 표식 줄까지 오다가 멈춘다. 오늘은 그 줄에 내가 서 있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선다. 또 한 걸음. 그렇게 숲 안쪽으로 물러나다가 선다. 세어 본다. 열두 걸음이다.
어제는 내가 열두 걸음 밖에 있었고, 그녀가 줄에 섰다. 오늘은 그녀가 물러나서 열두 걸음을 맞췄다.
말이 곧장 온다. 그 앞에 아무 소리도 없다.
"도끼 든 손으로 인사부터 하는 건 어느 마을 예법이야, 나무꾼."
여덟 번째 듣는다. 억양 하나 다르지 않다. 맨발은 눈에 빠지지 않고, 입에서는 김이 나지 않는다.
"네 까마귀가 어젯밤 내 어깨에 앉았어."
그녀의 눈은 곰 어금니로 내려가지 않는다. 일곱 번 내내 거기서 반 박자 머물던 눈이다. 오늘은 내 얼굴에서 반 박자 멈췄다가 내 어깨 너머로 간다. 왼쪽으로 다섯째 자작나무의 그 가지 쪽이다.
"그 새는 들은 말만 해, 나무꾼."
원래 그 자리엔 '해 지기 전에 돌아가'가 왔다. 여덟 번 만에 처음으로 둘째 마디가 바뀌었다.
"그럼 누구한테 들었는데."
내 이름이 목까지 차오른다. 보그단. 나는 그걸 삼킨다. 이 숲에서 내 이름이 내 입으로 나온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걸 지켜야 그 새가 누구한테서 그 이름을 배웠는지 끝까지 가릴 수 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바람이 뼈 표식 위를 쓸고 간다. 가지에서 눈가루가 떨어진다. 그녀는 내 얼굴도 내 어깨도 보지 않는다. 우리 사이 열두 걸음의 눈만 본다. 그녀 쪽에는 셀 숨이 없어서 내 숨으로 센다. 하나, 둘… 일곱. 일곱 번 숨을 쉬도록 아무 말이 없다.
"새벽까진 아무도 안 기다려."
어제 아침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셋째 마디다. 대답은 아니다. 그녀가 돌아서고, 자작나무 사이로 잿빛 숄이 지워진다.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가시덤불에 팔이 긁히지 않는다. 대신 방금 들은 말을 다시 짚는다.
그 새는 들은 말만 한다고 했다.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다.
뼈 표식 줄 바로 바깥에 오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다. 바람에 꺾인 지 오래돼서 속까지 말랐다. 일곱 번 이 앞을 지나쳤다. 그땐 소금이 필요 없었다.
도끼를 든다. 하나, 둘. 언 나무가 쩍 갈라지고, 그 소리가 숲 안쪽으로 굴러 들어간다.
셋째 도끼질을 하려는데 등 뒤가 조용해진다. 까마귀 때문도 바람 때문도 아닌 조용함이다.
돌아본다. 그녀가 있다. 표식 줄 안쪽, 자작나무 두 그루 사이, 열두 걸음.
이 시각에 나는 여기 있어 본 적이 없다. 일곱 번 다 이맘때면 야리나 부엌에서 손을 녹이고 있었다. 이 시각의 그녀를 나는 모른다.
"숲이 눕힌 나무를 쪼개서, 마을 가서 뭘 사려고, 나무꾼?"
이번에도 질문으로 연다. 그런데 처음 듣는 질문이다.
"소금."
"숲 물건으로 마을 걸 사겠다는 거야?"
"표식 바깥에 누운 나무야."
"뼈 표식은 발을 가르는 금이지, 뿌리를 가르는 금이 아니야."
대꾸하지 않고 도끼를 내린다. 넷, 다섯.
"도끼질을 셈하듯 하네. 입술이 자꾸 움직여. 나무는 안 세. 세는 건 때리는 쪽뿐이야."
손이 멈춘다. 셈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입술이 움직였나 보다.
"넌 이 시각에 여기서 뭐 해."
"도끼 소리가 나면 숲이 먼저 들어. 나는 그다음이고. 오늘은 숲이 꽤 시끄럽네."
그게 대답의 전부다. 나는 다시 도끼를 든다. 날이 내려가기 직전에 그녀가 말한다.
"옹이 피해서 쳐. 거기 치면 날이 튀어서 손등 찢어져."
도끼가 공중에서 멈춘다. 날 아래, 결 한가운데에 손가락 마디만 한 옹이가 박혀 있다. 열두 걸음 밖에서 그게 보였을 리가 없다.
"왜 알려 줘."
"피 묻은 장작은 주막에서 안 받아. 그뿐이야."
옹이 옆 결을 친다. 나무가 깨끗하게 갈라진다. 손등은 멀쩡하다. 이 숲에서 그녀한테 처음 받아 보는 것이다.
다발을 묶으려고 몸을 숙이자 품에서 장부 귀퉁이가 삐져나온다. 그녀의 눈이 거기서 멈춘다.
"품에서 삐져나온 거, 붉은 실로 엮었네. 그것도 숲 물건이야, 나무꾼?"
"몰라. 눈 뜰 때부터 있었어."
"모르는 걸 품에 넣고 다녀? 숲에선 모르는 건 먼저 물어."
그러고는 그녀가 묻지 않는다. 눈이 실에서 내 손목으로, 거기 감긴 같은 색 실로 옮겨 갔다가 돌아온다. 나는 장부를 밀어 넣고 삼끈 두 가닥으로 다발을 묶는다. 하나, 그리고 둘.
"장작 한 다발이면 하룻밤. 소금 한 줌이면 하루. 두 다발이면 누구 밤을 사려는 거야, 나무꾼?"
"사냥꾼 하나. 하루."
"남의 하루를 사 주면, 제 하루는 누가 사 줘?"
내 하루는 매일 온다. 그 말을 삼킨다.
"하루가 너한텐 그렇게 싸?"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선 하루가 제일 비싸."
그녀는 그 말을 나 말고 장작더미에 대고 한다.
"팔린 하루를 되사겠다고?"
"응."
"망설이지도 않네. 그 사냥꾼, 너한테 뭐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하루를 두 다발로 사? 셈이 서툴구나, 나무꾼."
가지에서 눈가루가 한 번 떨어지는 동안 그녀가 말을 멈춘다.
"그건 네가 낼 값이 아니야."
어젯밤 셋째 나무 밑에서 들은 말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다. 그녀에게는 처음 하는 말이어야 한다.
"그럼 누가 내는데."
"숲은 셈을 틀리지 않아. 눈 위에 뼈 하나가 비면 바람이 그 자리를 먼저 알아, 보…"
입이 닫힌다.
숨 없는 입이 한 번 다물린다. 바람이 표식 줄을 한 번 다 쓸고 지나갈 만큼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다시 열린다.
"…나무꾼. 숲에선 하나를 빼면…"
끝을 맺지 않는다. 그녀가 등을 돌린다. 이번에는 나무 뒤로 가는 걸음이 빠르다. 잿빛이 자작나무 사이에서 금세 지워진다.
도끼 자루를 쥔 손바닥이 젖어 있다.
나무꾼, 다섯 번. 그중 다섯 번째는 다른 글자로 시작했다. 보.
나는 이 숲에서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장작 두 다발을 등에 진다. 대장간 개는 미콜라가 문을 나설 때 두 번 짖는다. 개가 짖기 전에 소금을 구해야 한다. 뛴다.
즈본에서 숲으로 난 길의 마지막 집이 즐라타의 주막이다. 처마에 고드름이 이빨처럼 매달렸다. 문을 밀자 데운 술과 젖은 양털 냄새가 훅 끼친다. 일곱 번 다 이 앞을 지나치기만 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일찍 나오셨네요."
붉은 수건을 두른 늙은 여자의 눈이 내 얼굴보다 장작에 먼저 간다. 그러자 곧장 말이 반말로 내려앉는다.
"소금이야, 장작이야? 한 다발에 반 줌."
"마을 소금장수는 반 다발에 한 줌 쳐 줘."
"그럼 거기 가. 그 양반은 해가 지붕 위로 올라와야 장을 펴거든."
그땐 늦다. 둘째 다발을 내려놓는다. 두 다발에 한 줌이다. 즐라타가 크게 웃었다가 금세 웃음을 거두고, 자루에서 소금 한 줌을 내 손바닥에 쏟는다. 차고 까끌까끌하다.
즐라타가 코를 한 번 킁 하더니 목소리를 확 낮춘다.
"손님한테서 자작나무 껍질 냄새가 나거든. 문턱에서 맨발 여자 봤지? 베스나. 그 여자 얘기면 이 즐라타가 두 잔 값을 쳐 주지."
베스나.
그녀에게 이름이 있다. 어제 저녁 그 등에 대고 물었을 때는 대답이 없었다. 그 이름이 주막 여자 입에서 소금값처럼 나온다.
팔지 않는다. 맨발도, 김 안 나는 입도, 옹이도. 소금 한 알을 집어 탁자에 놓고 대장장이 집 막내 얘기를 묻는다. 즐라타가 그 한 알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또 웃는다.
"딱 한 알만큼만 해 주지. 그 집이 지난겨울에 새 모루를 외상으로 들였어. 오늘이 갚는 날이고, 오늘 몫이 딱 한 줌이야."
"누구한테 진 외상인데."
"나한테."
미안한 기색 없이 웃음을 머금은 말이다. 손바닥의 소금이 무거워진다. 일곱 번 죽는 걸 보고도, 그가 왜 손을 드는지 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다음엔 숲 얘기 들고 와요."
다시 손님 대하는 말투가 등에 붙는다. 다음 새벽이 오면 이 여자는 나를 처음 본다.
처마 밑에서 걸음이 멎는다. 입술을 한 번만 움직인다. 소리는 내지 않는다.
베스나.
어젯밤 그 새도 이렇게 배웠을까. 아무도 없는 데서, 들킬까 봐 한 번만 부르는 걸 들었을까.
대장간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오른다. 개는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아직 짖지 않았다.
미콜라는 모루 옆에서 외투 단추를 채우고 있다. 허리춤에 빈 소금 주머니가 납작하게 붙어 있다. 나를 보고 웃는다. 어젯밤 셋째 나무 밑에서 그대로 얼어 있던 웃음이다.
팔을 잡지 않는다. 대신 손을 편다.
"오늘 갚을 거 있지."
웃음이 반쯤 멈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다. 그가 이걸 왜 자기한테 주냐고 묻는다.
"빌려주는 거야. 갚는 건… 내일."
내일은 오지 않는다. 그냥 주는 거다.
미콜라가 약지 없는 손으로 소금을 받는다. 손가락 넷 사이로 알갱이 몇 개가 샌다. 그걸 보며 또 그 농담을 한다. 반지 낄 손가락이 없으니 장가는 글렀다고. 일곱 번 들은 농담인데, 처음으로 웃음이 난다. 콧김 한 번.
미콜라가 주먹을 쥔다. 받은 소금은 돌려주지 않는다. 그게 변경의 셈이다. 그가 안에 대고 소리친다. 빚 갚을 게 생겼으니 숲엔 안 간다고. 허리 나간 대장장이가 쉰 기침으로 대답한다. 큰아들들은 지난가을에 다 떠났다.
개가 귀만 한 번 세웠다가 내린다. 짖지 않는다.
언덕 아래 우물가에서는 영감이 얼어붙은 두레박에 욕을 하고, 욕 끝을 꼭 한 번 말아 올린다. 그건 그대로다. 영감한테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손댄 데만, 딱 그만큼 바뀐다.
"보그단! 야, 내 말 좀 들어봐!"
스테파나가 언덕을 뛰어 내려온다. 허리에 도끼를 찼고, 소매엔 자작나무 껍질 부스러기가 붙어 있다.
"초소 장작 패 주고 오는 길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길잡이가 안 왔대! 관리관 양반이 명부 펴 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 온대!"
"알아."
"알아? 너는 뭘 그렇게 다 알아?"
스테파나가 내 팔을 붙잡는다. 오늘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신이 나서 잡는다.
"구경 가자. 그 양반 화내는 거 본 사람이 없대."
초소에 오르자 길잡이 칸만 빈 명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샨은 활을 등에 멨고 손이 비었다. 오늘은 내가 아무의 팔도 잡지 않았다.
"측량은 해 지기 전에 끝나야 하오. 길잡이야 다시 구하면 될 일이지."
'지'에서 말끝이 말려 올라간다.
스테파나가 귓속말을 한다.
"야, 진짜 화 안 내네. 그게 더 무섭다."
라도미르의 눈이 천천히 돈다. 병사들을 지나고 구경꾼들을 지나, 바람처럼 내 얼굴을 넘어간다. 명부에 없는 내 말은 여기선 소리도 안 된다. 그 눈을 비켜 언덕 아래를 본다. 마을 지붕들 너머, 뼈 표식 안쪽에 잿빛 점 하나가 서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라도미르의 눈이 내 옆에서 멈춘다. 허리에 찬 도끼, 소매에 붙은 껍질 부스러기.
"성명이 어찌 되오."
"스, 스테파나인데요. 왜요?"
손가락이 명부의 한 줄에서 멈춘다.
긴 쉼.
"있소."
또 긴 쉼. 그녀 이름은 명부에 있다. 셀 수 있는 사람이다. 셀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숲 가장자리 나무를 베는 분이니, 길은 알 테고."
펜을 잉크에 담근 채 그가 고개를 돌린다.
"두샨."
궁수가 한 걸음 나온다.
"저 여자분이 좋겠소."
스테파나의 손가락이 내 팔을 파고든다. 외투 위로도 손톱이 느껴진다. 그녀가 웃으려다 만다. 웃음이 목에 걸리고, 그 틈으로 말이 샌다.
"나는… 안 들어가."
농담으로 하려던 말이다. 농담이 되지 않는다. 언덕이 떠나가게 떠들던 스테파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선 내 귀에도 겨우 닿는다.
미콜라가 비운 칸에 스테파나의 이름이 들어가려 한다. 소금을 도로 달라는 말은 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은 저 펜을 미콜라 이름으로 돌려놓는다.
해 지기까지 반나절. 셋째 나무는 문턱에서 서른 걸음이다. 낮에는.
미콜라냐, 스테파나냐.
펜 끝에 잉크가 모이는 동안 낮에 들은 목소리가 귀에 되돌아온다.
숲에선 하나를 빼면…
그건 네가 낼 값이 아니야.
이제야 그 뒷부분을 안다. 숲에선 하나를 빼면, 그 자리가 오래 비어 있지 않는다. 값은 내가 내지 않는다. 내가 비운 자리에 들어선 사람이 낸다. 그녀는 오늘 낮에 그걸 다 알고 내 장작을 보고 있었다. 품속 장부가 무겁다. 오른쪽 맨 아래 그 작은 칸을 왜 그었는지, 처음으로 알 것 같다.
언덕 아래를 다시 본다. 아침 내내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잿빛 점이 한 걸음, 표식 줄 쪽으로 다가선다. 이 초소에서 그걸 보는 사람은 나 하나다. 열두 걸음보다 훨씬 먼 데서, 숨 없이, 그녀가 이 셈을 보고 있다. 끊긴 그 문장의 나머지를 내 머리가 아니라 그 입으로 듣고 싶다.
라도미르의 펜 끝에 잉크 한 방울이 맺힌다.
곧 떨어진다.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