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손
톡.
잉크 방울이 명부에 떨어진다. 길잡이 칸 바로 옆, 아직 아무 이름도 적히지 않은 자리다. 작은 소리인데 초소 안 사람이 다 들은 것 같다.
라도미르가 펜을 다시 잉크에 담근다. 스테파나의 손톱이 외투 위로 내 팔을 더 깊이 파고든다.
해가 지면 셋째 나무 밑에 누군가 앉는다. 일곱 번은 미콜라였다. 오늘 나는 그 자리를 비웠다. 숲에선 하나를 빼면…. 낮에 그녀가 반만 하다 만 말이다. 그 끝을 나는 안다.
언덕 아래, 뼈 표식 안쪽에 잿빛 숄이 서 있다. 아까 한 걸음 다가선 자리에 그대로다.
미콜라도 아니고 스테파나도 아니면, 남은 사람은 하나다.
"길잡이, 내가 할게. 보그단. 명부엔 없어."
초소에서 내 말이 처음으로 소리가 된다. 아침 내내 바람처럼 나를 지나가던 라도미르의 눈이 처음으로 내 얼굴에 선다. 손가락이 명부의 줄을 따라 내려가다 맨 끝에서 멈춘다.
"명부에 그런 이름은 없소."
그는 펜을 내려놓고 탁자 밑에서 작은 자루를 꺼낸다. 소금 한 줌을 쏟는데, 내 손바닥이 아니라 탁자 위다.
"다만, 보그단 씨."
긴 쉼. 화로에서 장작이 한 번 튄다.
"이름 없는 손은 써도 되오. 저 여자분은 돌아가셔도 되오."
그는 길잡이 칸에 펜을 대지 않고 명부를 덮는다.
나는 소금을 쓸어 담는다. 손바닥 옆날로 탁자 모서리까지 한 번에 훑고, 다른 손을 모서리 밑에 대어 받는다. 한 알도 흘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자고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기억하는 새벽들 중에는 이 탁자에서 소금을 쓸어 담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손은 이 탁자 모서리가 어디서 끝나는지 안다.
소금은 차고 까끌까끌하다. 오늘 두 번째로 쥐는 한 줌이다. 변경에서 소금 한 줌이면 하루를 산다. 대공이 내 하루를 샀다.
초소 문을 나서자마자 스테파나가 내 앞을 막아선다.
"너 미쳤어? 고마운데, 고맙긴 한데 미쳤어! 이름도 안 적어 주는 데다 왜 네 다리를 내놔?"
"알아."
"또 알아래! 너 오늘 알아 말고 할 줄 아는 말 있어?"
목소리는 언덕이 떠나가게 큰데, 내 소매를 쥔 손은 떨린다. 놓지도 않는다.
"나는 안 들어가. 알지?"
"알아."
"경계까지는 따라갈게. 거기서 네 도끼나 갈아 놓고… 도끼는 네가 들고 가야지. 그럼 나는 거기서 뭐 해?"
"세어."
"뭘?"
"나오는 사람."
스테파나의 입이 닫힌다. 오래 같이 나무를 벤 사이다. 이 말은 농담으로 덮지 못한다.
역청 통 곁에서 두샨이 활시위를 손끝으로 한 번 튕긴다.
"거기. 해가 저 깃대 끝에 걸리면 나갑니다. 늦으면 두고 가고요."
나는 측량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내려간다. 그녀가 아직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야 한다.
뼈 표식 줄까지 아직 마흔 걸음이 남았는데 그녀가 고개를 든다. 내가 그녀를 알아본 것보다 먼저다.
오늘 이 줄 앞에 서는 건 두 번째다. 그녀는 열두 걸음 안쪽, 하얀 자작나무 두 그루 사이에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볼 때는 점이었다. 여기서는 속눈썹에 앉은 서리까지 보인다. 녹지 않는 서리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서 외투 주머니로 내려간다. 소금이 든 쪽이다.
"초소에서 내려온 사람 주머니에 소금이 들었으면 둘 중 하나야. 길을 팔았거나, 사람을 팔았거나. 어느 쪽이야, 나무꾼?"
"길."
"남의 길을 판 사람은 그렇게 뛰어 내려오지 않아. 제 길을 팔았구나."
"사냥꾼 대신이야."
그녀는 말이 없다.
"대장장이 막내. 오늘은 대장간에 있어."
그녀의 눈이 언덕 너머 연기로 간다. 대장간 굴뚝이다. 거기서 한참 머문다.
"그 사람 하루는 소금으로 샀구나."
한 박자 쉬고, 눈이 나한테로 돌아온다.
"그럼 네 하루는 누가 샀어, 나무꾼?"
"대공이. 한 줌."
"싸게도 팔렸네."
목소리에 아무것도 얹혀 있지 않다. 얹힌 게 없어서 더 깊이 박힌다. 잿빛 숄이 반쯤 돌아선다. 저대로 가게 두면 끊긴 문장은 영영 끊긴 채로 남는다.
"숲에선 하나를 빼면."
돌아서던 어깨가 멈춘다.
낮에 그녀가 끝맺지 않은 말이다. 반나절 동안 머릿속에서 굴렸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고 우리 사이 열두 걸음의 눈을 본다. 반 박자 뒤에 그 문장의 나머지가 온다. 내 머리가 아니라 그녀의 입에서.
"…빈자리가 남아. 숲은 빈자리를 오래 안 둬. 바람이 먼저 와서 덮고, 그다음엔…"
또 끊긴다. 그래도 아까보다 한 마디 더 왔다.
"그래서 내가 들어가. 그 빈자리에."
그녀가 고개를 든다.
"그건 네가…"
"낼 값이 아니야. 아까 들었어."
내 입에서 나온 '값'은 그냥 값이다. 그녀 입에서 낮고 길게 굴러야 다른 낱말이 된다. 장부 오른쪽 맨 아래, 내가 왜 그었는지 모르는 그 칸의 낱말이.
그녀가 곁에 선 자작나무 껍질을 손톱으로 한 번 튕긴다. 딱.
"…또 그 말이네."
제가 한 말을 내가 돌려줬다. 그녀의 입꼬리가 무언가 하려다 만다. 웃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알아보기 전에 거둬 간다.
그녀가 내 발치를 내려다본다. 장화 코가 뼈 하나에 닿아 있다.
"너는 그 금을 몇 번 넘었어, 나무꾼?"
"일곱 번."
말해 놓고 아차 한다. 그녀에게는 어제가 없어야 한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 멈춘다. 이번에는 비켜 가지 않는다. 입술만 아주 조금 움직인다.
"…일곱."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짚어 보듯 낮다. 처음 듣는 숫자를 따라 하는 목소리 같지 않다. 이미 세고 있던 수에 하나를 맞춰 보는 목소리 같다.
그러고 나서야 눈이 숲 안쪽으로 비켜 간다.
"숫자를 세는 사람은 언젠가 숫자한테 잡아먹혀."
무심한 말인데 그 밑에 뭔가 깔려 있다. 같은 길을 너무 많이 걸은 발바닥 같은 것. 나는 장부를 꺼내 여덟째 장에 적는다.
길잡이. 소금 한 줌. 이름은 안 적힘.
연필 끝이 오른쪽 맨 아래 값 칸으로 미끄러진다. 멈춘다. 비워 둔다.
"뭘 그렇게 적어?"
"오늘."
"오늘은 적어 봐야 오늘뿐이야."
"그래도 적어. 안 적으면 나밖에 몰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는다. 열두 걸음 저쪽에서 그녀의 눈이 장부를 엮은 붉은 실에 걸렸다가 내 손목으로 간다. 낮에 장작더미 앞에서 본 것을 다시 본다. 바람이 한 번 표식 줄을 쓸고 간다.
"…적어 둔 사람도, 결국 혼자 읽어."
그녀가 돌아선다. 자작나무 사이로 두 걸음 들어가다가 멈춘다. 등을 진 채로 숲에 대고 말한다.
"오른쪽으로 누운 눈 밑은 물이야."
'물'을 아주 짧게 내리꽂는다.
"오른쪽이 어디 기준인데."
이번엔 돌아본다.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오른쪽. 나오는 사람한텐 왼쪽이고."
한 박자.
"나올 생각은 있어, 나무꾼?"
"세어 줄 사람이 있어. 문턱 밖에."
"밖에서 세는 사람은 나온 사람만 세. 안 나온 사람은 누가 세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녀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나무 뒤로 숨지 않는다. 열두 걸음을 둔 채 숲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잿빛이 작아지다가 하얀 줄기들 사이에 섞인다. 끝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입속으로 한 번 따라 해 본다. 오른쪽으로 누운 눈 밑은 물이야. 장부에 적는다. 이번엔 손이 얼지 않았다.
해가 깃대 끝에 걸릴 즈음 측량대가 내려온다. 병사 여섯, 측량관 하나, 서기 하나, 맨 뒤에 두샨이다. 쇠사슬 자를 두 사람이 나눠 들었고, 등에는 말뚝 다발을 졌다. 사슬이 눈 위에 끌리며 낮게 철렁거린다.
스테파나는 표식 줄 세 걸음 앞에서 멈춘다. 자로 잰 듯 정확하다.
"보그단."
손을 들었다가, 내 팔 대신 자기 팔을 붙잡는다.
"셀게. 나오는 사람."
"응."
나는 맨 앞에 선다. 미콜라가 서던 자리다. 뼈 표식을 넘자 발밑에서 눈이 무릎까지 꺼진다. 뒤에서 사슬 소리가 따라 넘어온다. 내 뒤로 아홉 사람이다. 다 넘자 공기가 달라진다. 바람이 없는데 귀가 시리다.
왼쪽으로 다섯째 자작나무에서 까마귀가 운다.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
병사 하나가 웃는다. 측량관은 고개도 들지 않는다.
나는 걸음을 늦춘다. 저 새는 들은 말만 한다. 오늘 아침 경계에서 그녀의 둘째 마디는 '그 새는 들은 말만 해'였다. '돌아가'는 오늘 그녀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저 새가 들은 건 오늘의 그녀가 아니다.
걸으면서 장부를 꺼낸다. 눈에 무릎이 빠질 때마다 연필이 흔들린다.
새: 돌아가, 세 번. 오늘 아침 그녀는 안 한 말.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쓴다.
새는 어제를 기억한다.
연필이 멈춘다. 새가 기억하는 어제의 그녀가 있다면, 그녀는. 그 줄은 쓰다 만다. 그녀에게는 어제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아까 '일곱'을 되받던 입술이 자꾸 떠오른다.
자작나무 사이에 잿빛이 하나 섞여 있다. 열두 걸음 밖이다. 우리가 걸으면 그녀도 걷는다. 그녀가 지나간 눈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길잡이가 문턱을 제일 먼저 넘네. 뒤에 몇이 오는지는 세어 봤어, 나무꾼?"
"아홉."
"틀렸어. 열이야."
나는 나를 빼고 셌다. 명부도 나를 빼고 센다.
"숲은 명부를 안 봐. 금을 넘은 발은 다 세."
한 박자.
"나올 때도 세. 숲은 들어온 수만큼 내보내지 않아."
스테파나한테 한 말이 그녀 입에서 돌아온다. 그녀가 그 말을 들었을 리 없다.
"세면 잡아먹힌다며."
"혼자 세면."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나무 사이로 섞인다. 혼자 세면. 그 세 글자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보다 무겁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한다. 병사들은 사슬과 말뚝만 본다. 두샨만 맨 뒤에서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반 박자 늦게 다시 앞을 본다.
나는 돌아서서 오른쪽으로 누운 눈을 밟지 말라고 한다. 측량관이 "누가 그럽디까." 하고 묻고, 내가 "숲 사람이."라고 하자 병사 둘이 킁 웃는다. 서기는 판때기에 붓을 대지 않는다. 명부에 없는 사람 말은 숲에 들어와서도 소리가 안 된다.
나무 사이에서 그녀 목소리가 온다. 나한테만 닿을 만큼 낮다.
"숲 사람 말이라서 그래. 숲 사람은 원래 명부에 없거든, 나무꾼."
웃음기는 없다. 비웃는 것 같지도 않다.
명부에 없는 사람이 이 숲에 둘이다. 그녀가 그걸 나한테 말했다. 무슨 말로 받아야 할지 찾다가 못 찾고, 대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열두 걸음 밖, 잿빛 숄 아래에서 그녀의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비켜 가지 않는다. 숨 한 번만큼. 먼저 눈을 내리는 건 그녀다. 그러고도 가지 않는다. 열두 걸음을 둔 채, 우리와 같은 빠르기로 나무 사이를 걷는다.
셋째 나무를 지난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다. 해가 낮아 그림자가 길다. 낮에는 문턱에서 서른 걸음이었다. 지금은 세지 않았다. 혼자 세면 잡아먹힌다는 말이 귀에 남아 있다.
밑동이 비어 있다. 일곱 번, 해 질 녘이면 거기 미콜라가 앉아 있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언 손가락에 활시위를 감은 채. 오늘은 눈만 있다. 누구의 무릎 자국도 없다.
나도 모르게 숨이 길게 나간다. 입김이 하얗게 번진다. 열두 걸음 밖 그녀의 입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김이다.
그 너머로 비탈이 낮아지고 움푹한 분지가 나온다. 바람이 한쪽으로만 불어와 눈을 쓸어 눕혀 놓았다. 왼쪽 눈은 거칠고 울퉁불퉁한데, 오른쪽 눈은 이상하게 매끈하다. 빗질한 머리카락처럼 한 방향으로 누워 있고, 해 질 녘 빛이 그 위에서 미끄러진다.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오른쪽.
"멈춰."
내 목소리가 분지에 부딪혀 돌아온다. 측량관은 멈추지 않는다. 사슬을 끝까지 당기며 매끈한 눈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말뚝을 진 병사가 그 뒤를 따르고, 또 하나가 따른다.
"거기 오른쪽!"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어디가 꺼지는지 아는 손을 소금 한 줌에 사 놓고, 그 손이 하는 말은 듣지 않는다. 이름 없는 손은 쓰기만 하는 손이다.
두샨이 맨 뒤에서 걸음을 멈춘다. 숲 쪽을 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뛴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차고 나가 맨 앞 병사의 깃을 움켜쥐고 뒤로 홱 잡아당긴다. 병사가 왼쪽 거친 눈 위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 반동에 내 장화가 앞으로 미끄러진다. 매끈한 눈 위다.
발밑이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단단하다. 너무 단단하다. 장화 밑창으로 돌 같은 냉기가 올라온다.
빈자리는 내가 채우겠다고 했다. 숲은 빈자리를 오래 두지 않는다.
열두 걸음 밖, 자작나무 사이에서 잿빛 숄이 멈춘다. 우리가 걸으면 같이 걷던 그녀가 걷다 말고 선다. 그런 그녀를 나는 처음 본다.
그리고 그녀가 한 걸음, 내 쪽으로 나온다.
열두 걸음이 열하나가 된다. 맨발 밑에서 눈이 꺼진다. 발목이 묻힌다. 그녀가 섰던 자리 앞에 작고 오목한 자국 하나가 남는다. 여덟 번의 새벽 동안 한 번도 남지 않던 발자국이다.
그녀는 그 자국을 내려다보지 않고 나를 본다.
"…보"
발밑에서 가는 소리가 난다. 손톱으로 언 유리를 긋는 것 같은 소리다. 그 소리에 그녀의 첫 글자가 반쯤 묻힌다. 숨 없는 입이 닫혔다가, 한 박자 늦게 다시 열린다.
"…나무꾼."
이번엔 질문이 아니다. 목소리가 낮다.
들었는지 모르겠다. 낮에 장작더미 앞에서 한 번 끊겼던 그 글자인지, 얼음이 낸 소리인지. 그 한 글자를 다시 들으려고 숨을 멈춘 사이, 내 발밑에서 얼음이 갈라진다.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