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장부
장부가 덮이는 소리는 작았다. 가죽 표지가 종이를 누르는, 숨 같은 소리였다. 그 안에 내 이름이 있었다. 아흔 날 뒤 그의 잔을 들고 그의 검 앞에 설 이름이었다.
명단에서 빠지면 잔을 올릴 일이 없다. 잔을 올리지 않으면 베일 일도 없다. 그 생각이 머리보다 입에 먼저 닿았다.
"그 명단은, 바꿀 수 있는 건가요?"
말해 놓고서야 끝이 올라간 말꼬리가 귀에 들렸다. 야근하던 사무실에서 팀장에게 일정을 묻던 말투 그대로였다. 시종장 발렌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리네트 시녀. 고칠 사유가 있으시면, 하녀장을 거쳐 올리시지요." 장갑 낀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가지런히 맞췄다. "…다만, 고친 줄도 장부에는 남습니다만."
회랑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이었다. 아침 복도에서 내 앞에 멎었던 바로 그 걸음이었다. 발렌이 먼저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
"전하. 정원으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이마를 숙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벽등 불빛이 비친 대리석 위에서 짙은 감색 제복 자락이 멈췄다.
"시종장. 연회 장부를 밤에도 들고 다니는군."
"장부는 잠들지 않는 법이지요, 전하. 오늘은 시중 명단에 한 줄 적었습니다." 발렌의 목소리는 아침 인사를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전하께서 이름을 물으신 시녀라 들었습니다. 전하 눈에 드신 손이라면, 연회 밤 곁에 두는 것이 예에 맞지요."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숙인 내 눈 끝에서 검은 장갑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내가 이름을 물어서인가."
"법도가 그러합니다."
"그 장부, 잘 간수해라. 시종장."
"장부는 늘 제자리에 있습니다, 전하."
발렌이 내 곁을 지나갔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그의 발소리가 회랑 모퉁이로 사라진 뒤에도 감색 자락은 그 자리에 있었다.
"시녀. 시종장에게 무엇을 물었지."
"…명단에 올랐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건 시종장이 한 말이다. 네가 한 말을 묻고 있다."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그가 대신 열었다.
"바꿀 수 있는 건가요."
내가 한 말이었다. 끝이 올라가던 내 말투에서 높낮이만 걷어 낸, 낮은 목소리였다. 회랑은 소리가 잘 울렸다. 그는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
"연회 시중은 시녀들이 서로 서겠다고 다투는 자리다. 그런데 너는 명단에 오른 첫날 밤에 내려올 길부터 묻는다." 벽등 불꽃이 한 번 기울었다가 섰다. "그 밤 내 곁에서 잔을 든 손이 무엇을 치르는지, 아는 사람처럼."
"…손이 서툽니다, 전하."
"등불 앞에서 떨지 않던 손이다. 낮에는 동궁 주인의 얼굴을 몰랐다더니, 밤에는 손이 서툴다. 하루에 두 번이군."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세고 있을 뿐이었다. 내 거짓말을.
참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가 가장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흔 날 뒤 그 잔을 올린 시녀를 전하께서 베신다고는.
침묵이 길어졌다. 그가 돌아설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서지 않았다.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 박자 늦었고, 반 톤 낮았다.
"내가 묻지 않았으면, 너는 아직 가구였겠지."
나는 숨을 삼켰다. 그 말은 회랑의 찬 공기 속에 그대로 놓였다. 그는 그 말을 거두러 오지 않았다.
"가라."
그날 밤 숙사 침상에 눕자, 어둠 속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나고 창이 떴다.
배역: 동궁 소속 시녀 리네트. 비고: 달의 연회 시중. 3화에서 퇴장.
그가 물어서 생긴 내 이름이, 내 죽음 바로 앞 칸에 적혀 있었다.
아침, 그레텔 하녀장은 열쇠꾸러미를 짤랑이며 걸음도 늦추지 않았다.
"마르테가 아직 못 일어났다. 오늘도 동궁 다과는 네가 차려라."
다과 준비실은 김이 자욱했다. 구리 주전자가 낮게 끓었고, 높은 창으로 든 아침 해가 김 속에서 하얀 기둥처럼 서 있었다. 시녀 다섯이 제자리에서 손을 놀렸다. 문 옆 못에는 잔 출납 장부가 걸려 있었다. 깨진 잔, 바꾼 잔이 한 줄씩 적히는 장부였다. 그 아래 걸상에서는 열두어 살 된 시종 소년이 내전에서 내려온 주문 쪽지를 소리 내 읽었다.
"동궁 서재, 오후 다과 한 벌. 동궁 서재, 잎은 지난번 것으로…"
나는 셋째 찬장, 위에서 둘째 칸에서 금테 두른 잔을 꺼냈다. 이틀째인데 이 방은 손이 먼저 알았다. 잔에 차를 따르는 사이, 곁에서 주근깨 난 손등이 금테 쪽으로 뻗어 왔다가 한 뼘 앞에서 멈췄다. 그 손은 행주를 집어 들고 물러났다. 행주 자락 밑으로 접힌 종이 꾸러미가 하얗게 비쳤다가 앞치마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김이 서려서요."
브리타가 말했다. 잔에는 김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때 소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동궁 서재, 오후—"
먼저 들어온 것은 찬 공기였다. 김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다음 짙은 감색 자락이 문턱을 넘었다.
황족이 이 방에 들어섰다는 말은 누구도 들어 본 적 없었다. 국자가 솥 안으로 떨어지고 걸상이 밀렸다. 시녀 다섯과 소년이 한꺼번에 바닥에 엎드렸다. 나도 무릎을 꿇었다.
엎드리는 순간, 곁의 브리타가 손으로 앞치마 주머니를 꾹 눌렀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문간에 선 그의 눈높이에서 그 손은 김 뒤에 가려 있었다. 그는 보지 못했다. 나는 보았다.
"일어나라. 일하는 방이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족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이 이 방에는 없었다.
문틀에 기댄 로슈가 웃음 섞인 숨을 흘렸다. "다들 일어나요. 전하께서 차 끓는 걸 보고 싶으시답니다." 하나둘 몸을 일으켰지만, 고개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자락이 내 앞에 와 멎었다.
"잔이 오는 길이 길다 했지." 낮은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보러 왔다. 어디서 시작하지."
방 안의 숨이 전부 멎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시녀에게 묻고 있었다. 이름 없는 다과 시녀에게.
"…셋째 찬장입니다, 전하. 위에서 둘째 칸. 잔은 엎어 둡니다."
"엎어 두는 까닭은."
"먼지가 덜 앉고, 손이 덜 탑니다."
"덜."
"…예. 덜입니다."
그가 찬장 쪽으로 걸었다. 낯선 바닥을 디디는 사람처럼 걸음이 반 박자씩 늦었다. 서재에서는 본 적 없는 걸음이었다. 이 방에서 길을 아는 쪽은 나였다.
"다음."
"화덕입니다. 물이 먼저 끓고, 잎은 그 뒤에 넣습니다. 잔은 그동안 데워 둡니다. 그다음이 벨벳 상자입니다." 나는 탁자 끝 자줏빛 상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기미는 차를 따른 뒤에 합니다. 따르기 전에 하면, 따르는 사이가 빕니다."
"사이가 빈다." 그가 그 말을 되뇌었다. "그 사이에 손이 몇 닿지."
대답하기 전에 나는 방을 셌다. 주전자를 맡는 손, 잎을 덜어 주는 손, 쟁반을 닦는 손. 셋째가 브리타였다. 브리타의 손은 아직 주머니 위에 있었다.
"…셋입니다, 전하."
이름은 대지 않았다. 숫자만 댔다. 그가 셋을 듣는 동안 나는 셋째의 주머니를 보았다.
"셋." 그는 더 캐지 않았다. "잔을 이리 다오. 오늘은 내가 보지."
잔이 내 손에서 그의 손으로 건너갔다. 검은 장갑 끝이 내 손끝을 스쳤다. 가죽은 서늘했다. 스친 자리만 뒤늦게 뜨거워졌다.
그가 화덕 불 쪽으로 돌아섰다. 어제 그가 내게 일러 준 대로, 불을 등지지 않고 불 쪽으로. 그런데 그 앞은 김이 가장 짙은 자리였다.
"화덕 말고, 창 쪽으로 서십시오, 전하. 화덕 앞은 김이 서립니다."
말이 먼저 나갔다. 로슈의 헛기침이 중간에 걸렸다. 그는 반 박자 멈췄다.
"불 쪽으로 서라 했더니." 그가 창 아래 햇빛 기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네가 나를 세우는군."
잔이 그의 눈높이에서 천천히 기울었다. 햇빛이 흰 자기 안쪽을 타고 한 바퀴 돌아 그의 잿빛 눈에 작게 맺혔다. 나는 잔을 보지 않았다. 잔을 보는 그를 보았다. 어제 내 손끝을 보던 눈이 꼭 그랬다. 한 치도 서두르지 않았다.
"끊긴 데는 없다." 그가 잔을 쟁반의 받침에 내려놓았다. "은은 네 몫이다."
나는 벨벳 상자를 열어 수저를 찻물에 넣었다. 한 뼘 앞까지 왔던 주근깨 난 손등이 떠올라 조금 오래 담가 두었다. 수저는 흰 그대로 나왔다.
그가 받침 위에서 잔을 돌렸다. 도자기가 받침을 긁는 소리가 김 속에 울렸다. 방 안의 누구나 다음 소리를 기다렸다. 궁 사람이면 다 아는 버릇이었다. 두 번.
두 번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로슈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잔에서 손을 뗐다. 마시지는 않았다. 그래도 두 번이 한 번이 되었다. 네 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시녀 다섯이 듣는 자리에서 반으로 줄었다.
로슈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말씀하신 거요."
로슈의 눈이 방을 한 바퀴 훑었다. 시녀 다섯, 소년 하나. 그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 어제라면 가구 앞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방의 가구에는 귀가 열둘 달려 있었다.
"…짧게."
"입궁 사 년, 실수도 칭찬도 없음. 누구 줄도 아닙니다. 어제까지는요." 로슈가 접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명단 줄은 베껴 왔습니다. 오면서 급히 적어 아직 덜 말랐습니다."
걸상의 소년이 버릇처럼 손을 뻗었다. 쪽지를 읽는 게 그 아이의 일이었다. 장갑 낀 손이 한 발 먼저 쪽지를 받았다. 소년이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그는 쪽지를 펼치지 않고 쥔 채, 쟁반 위의 잔을 보았다.
"이 잔." 평평한 목소리였다. "네 손에 맞지 않으면, 내게 청하면 되지 않나. 다른 잔으로 바꿔 주지."
김 속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남들 귀에는 황태자가 시녀에게 찻잔을 바꿔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세답방에서 사흘은 돌 말이었다. 내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쪽지를 쥔 손 안에 그 줄이 있었다.
"청해 봐라."
손바닥에 땀이 뱄다. 한 마디면 됐다. 바꿔 주십시오. 그러면 그 줄은 사라진다. 그 대신 이 방의 입 여섯이 오늘 밤 새 줄을 쓸 것이다. 황태자가 잔을 바꿔 준 시녀. 황태자를 넘보는 시녀. 원작의 시녀 A에게는 없던 누명의 이유를 내 손으로 써 주는 셈이었다.
"…청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쪽지를 쥔 손가락이 멎었다.
"왜지."
나는 문 옆 못에 걸린 장부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모두가 그 장부를 알았다.
"바꾸면, 고친 줄도 장부에 남습니다."
이번 침묵은 길었다. 주전자 뚜껑이 한 번 달그락거렸다.
"어젯밤 들은 말이군."
"예."
"다른 길은."
"하녀장님께 여쭙겠습니다."
"어느 길로 가든, 끝나는 책상은 하나다." 칭찬인지 경고인지 끝까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하녀장을 거쳐 올리시지요. 어젯밤 그 공손한 목소리는 길을 일러 준 게 아니었다. 내 청이 제 책상까지 기어 올라오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앞치마 끈 아래로 찬 기운이 내려갔다.
"그러면 이 잔은 연회 밤까지 네 손에 있겠군."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반 뼘 들었다. 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잿빛 눈이 거기 있었다. 창으로 든 햇빛이 그 안에 작게 들어 있었다. 어제 아침 복도에서 바닥의 얼룩을 보던 눈이 아니었다.
"…예, 전하."
그는 먼저 눈을 내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내렸다.
그가 그제야 쪽지를 펼쳤다. 종이가 장갑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잿빛 눈이 그 한 줄을 따라 내려갔다.
"동궁 소속 시녀, 리—"
목소리가 거기서 멎었다. 방 안의 귀가 전부 그 반 글자에 매달려 있었다. 소년은 입을 벌린 채였다. 그는 다음 글자를 읽지 않았다. 대신 엄지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덜 마른 먹이 가죽 밑에서 번졌다. 손톱만 하던 얼룩이 동전만 해지는 것을 로슈가 보았다. 나도 보았다. 그 사람만 보지 않았다.
그는 쪽지를 반으로 접었다. 버리지 않았다. 제복 앞섶을 열고 품 안에 넣었다. 로슈가 입술을 한 번 깨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브리타가 쟁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재까지 나르는 건 원래 둘이 나눠 하던 일이었다.
"일단 제가 들게요."
말이 먼저 나갔다. 궁에서 쓰는 말이 아니었다. 브리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쟁반을 들어 가슴께에 받쳤다.
"그 말." 그가 돌아보았다. "어젯밤 회랑에서도 들었다. 어디 말이지."
"…고향 말입니다, 전하."
"고향."
한 박자가 비었다. 다음 말은 반 톤 낮았다. 나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이 방에서는 쓰지 마라. 귀가 많다."
경고였다. 그런데 경고라면, 어디서 쓰지 말라고까지 일러 줄 까닭은 없었다.
"서재로 들고 와라. 회랑 둘, 문 셋." 그가 문턱으로 돌아섰다. "네 손으로."
감색 자락이 나간 뒤에야 방이 숨을 쉬었다. 국자를 건지는 소리, 걸상을 바로 놓는 소리. 소년이 떨어뜨린 주문 쪽지를 주웠다. 아무도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다들 너무 열심히 보지 않았다. 브리타의 손은 아직 주머니 위에 있었다.
그 잔은 내가 서재까지 들었다. 그는 다시 돌리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다만 품 안의 쪽지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저녁의 하녀장 처소에는 밀랍 냄새가 짙었다. 그레텔 하녀장은 등잔 아래서 홑청 장부를 맞추고 있었다. 나는 문 안쪽에 서서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제 입으로 먼저 왔습니다, 하녀장님."
펜이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늦었다. 전하께서 준비실에 드셨다는 말은 점심 전에 세답방 끝까지 돌았다. 명단 일이면 꺼내지 마라. 그 장부엔 나도 손가락 하나 못 댄다. 삼십 년을 동궁에 있었어도."
이 궁에서는 내가 한 일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오늘 준비실에서, 브리타가—"
그녀의 손이 열쇠꾸러미로 갔다.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엄지로 쓸었다. 거멓게 죽은 열쇠 하나. 엄지가 닿는 자리만 새것처럼 빛났다. 숙사 침상 밑 궤짝에 딸린 놋쇠 열쇠였다. 시녀마다 하나씩 받는 것, 지금 내 앞치마 주머니에도 든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브리타의 이름이 혀끝에서 멎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내가 삼킨 이름을 묻지 않았다. 엄지가 그 빛나는 자리에서 멈췄다.
"고개 든 시녀가 전에도 있었지."
"…그 시녀는요?"
그녀의 입술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등잔 불이 흔들렸다.
"…아니다. 가서 자라."
그녀가 열쇠꾸러미를 움켜쥐었다. 짤랑, 하던 소리가 중간에 끊겼다. 그 손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처소를 나오자 서쪽 회랑이 차가웠다. 셋째 창 너머로 달빛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그 안을 감색 자락 하나가 혼자 걷고 있었다. 나는 창틀에 손을 얹었다. 그 걸음은 돌길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돌 때마다 내 눈도 따라 돌았다.
감색 자락이 걸음을 멈췄다.
고개가 들렸다. 이쪽 창이었다. 불 꺼진 회랑 창 안의 시녀가, 그 거리에서 보였을 리 없었다.
고개를 든 건, 이번에는 그쪽이었다.
고개를 드는 시녀는 오랜만이라던 사람이었다. 구름 한 장이 달을 덮었다가 비켜날 때까지 그는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그 품 안 어딘가에, 반 글자에서 멈춘 내 이름이 번진 채 접혀 있었다.
내일 누가 어느 복도에 있었느냐고 물으면, 이 창 하나만은 빼고 싶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벌써 이 창을 세고 있었다.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