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복도
벨벳 상자의 홈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은수저 열두 벌이 누워 있어야 할 자줏빛 상자였다. 어젯밤 등을 끄기 전, 마지막으로 뚜껑을 연 시녀가 수저를 셌다. 열하나였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 동궁 북쪽 쪽문 앞에 시녀들이 한 줄로 섰다.
돌바닥에는 밤이슬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호위기사 로슈 단 경이 줄을 따라 내려오며 한 사람씩 묻고 있었다. 묻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차례가 오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은 안 물을게요, 시녀님. 이제 아니까." 입김 사이로 웃음이 샜다. "수저 한 벌이 어디로 걸어 나갔는지 다들 모른다길래, 사람이 걸어간 길부터 듣는 중이에요. 준비실 드나든 사람은 좀 길게 듣고." 웃는 얼굴은 그대로 둔 채 말끝만 툭 떨어졌다. "어제 어느 복도에 있었지."
나는 어제 준비실에 있었다. 브리타도 있었다. 브리타의 앞치마 주머니에는 하얀 꾸러미가 있었다. 그 말을 여기서 한 마디라도 꺼내면, 그 말이 먼저 내 목을 감을 것이었다.
한 마디만 길어져도 끝이었다.
"숙사. 준비실. 북쪽 행랑. 서재 앞." 숨을 한 번 쉬었다. "저녁에 서쪽 회랑. 셋째 창 앞에서 잠깐 섰습니다."
로슈 경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다섯 번째에서 손이 멈췄다.
"창에선 뭐 했는데."
"정원을 봤습니다."
웃음기가 한순간에 빠졌다. "그 시각 정원은, 아무도 내려다보면 안 되는 데야."
나는 더 붙이지 않았다. 일부러 본 게 아니라고도, 금방 물러났다고도 하지 않았다. 핑계를 대면 말이 길어진다. 쪽문 처마에서 이슬 한 방울이 떨어져 돌바닥에 톡 소리를 냈다.
그때 로슈 경이 먼저 등을 폈다. 줄이 한꺼번에 허리를 굽혔고, 나도 문턱 앞에서 이마를 숙였다. 숙인 눈 아래로는 젖은 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돌 위로 짙은 감색 제복 자락이 들어왔다. 은사 수 한 줄이 새벽빛에 젖어 있었다. 자락은 줄 맨 앞을 지나 내 앞에 와서 멈췄다.
"몇이지."
"복도 다섯입니다, 전하."
"빠진 건."
로슈 경의 시선이 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는 로슈 경도 나도 알았다. 서쪽 회랑의 셋째 창. 그걸 뺐느냐는 물음이었다.
"…없습니다."
자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숨 하나가 다 빠져나가고 다음 숨이 들어올 때까지 그대로였다. 내 입김이 그쪽으로 흘러가는 게 보였다. 나는 숨을 참았다. 참은 숨이 가슴 안에서 뜨거워졌다.
그러고 나서야 자락이 돌아섰다. 동쪽 회랑 쪽이었다. 걸음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젖은 돌의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그 두 마디만은 귓속에서 식지 않았다.
로슈 경은 한참 나를 보았다. 그러다 웃음을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되돌렸다.
"…통과." 문턱을 넘는 내 등 뒤로 그가 덧붙였다. "거짓말은 길어요. 진짜는 짧고. 그래서 매일 물어요. 연회 날까지."
줄이 흩어질 무렵, 그레텔 하녀장이 열쇠꾸러미를 짤랑이며 지나가다 나를 세웠다. 나는 버릇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녀장은 야단보다 손등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됐다. 트인 거 보나 마나지. 밤엔 기름이나 발라라." 그녀는 내 손 대신 내 얼굴을 보았다. "마르테가 내일 일어난다. 오늘 동궁 시중이 네 마지막이다. 수저 일은 내가 본다. 너는 입 다물고 잔만 날라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 사람 곁에서 멀어지면 그만큼 그 검에서도 멀어진다. 그런데 손이 먼저 앞치마 끈을 움켜쥐었다. 잔이 지나는 길을 끝까지 보려면 하루로는 모자랐다. 이유는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녁 잔은 찬장에서 바로 나오지 않았다. 걸상의 소년이 쪽지를 읽은 뒤에야 나왔다.
"동궁 저녁 잔. 셋째 칸, 왼쪽 둘째."
쪽지 귀퉁이에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 탁자 끝 벨벳 상자는 열린 채였다. 빈 홈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느 잔인지는, 누가 정합니까."
브리타는 화덕 쪽을 본 채로 말했다. "시종장님 장부요."
나는 차를 따른 잔을 등잔 불빛에 들어 바닥을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비추었다.
준비실에서 서재로 가는 길은 둘이었다. 동쪽 회랑은 곧고 넓었다. 첫날 아침 내가 고개를 든 회랑이었다. 북쪽 행랑은 서재 건물 뒤편을 끼고 도는 좁은 돌길이었다. 쟁반 하나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는 폭이었고, 머리 위 높은 데에 서재 창이 하나 나 있었다. 어제 오후부터 나는 행랑으로 돌았다. 오늘 오후 다과도 그 길로 날랐다. 창 밑을 지날 때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 번째로 행랑 모퉁이를 돌았을 때, 길이 막혀 있었다.
짙은 감색이었다. 그 사람이 행랑 한가운데, 바로 그 창 밑에 서 있었다. 벽등 하나가 그의 어깨 너머에서 흔들렸다. 시녀와 하인과 세답방 수레가 다니는 길이었다. 황족의 신발이 밟을 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그 돌을 밟고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이마를 숙였다. 비켜 지나갈 틈이 없었다. 행랑은 그만큼 좁았다.
"시녀."
"예, 전하."
"다섯이었지. 셋째 창은 뺄 줄 알았다."
쟁반 위에서 찻주전자 뚜껑이 아주 작게 떨렸다.
"로슈가 그러더군. 정원을 봤다고. 정원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빼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 시각 그 창엔 불이 없다. 정원에서 올려다보면, 서 있는 사람이 달빛에 보인다. 그 시각 정원엔 나 혼자다. 본 건 나 하나다."
그 밤 나는 내가 보였는지 아닌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였다. 쟁반 손잡이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는 로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빼도 됐다." 그가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오늘 아침 그 줄은 수저 한 벌을 찾는 줄이었다. 그런 줄에서 창 하나를 내놓으면, 그 창이 네 목에 걸린다. 왜 넣었지."
"…어느 복도에 있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복도에도 있었습니다."
"물은 건 로슈다."
"예." 그다음 말은 삼키려 했다. 그런데 삼켜지지 않았다. "그저께 밤 회랑에서 전하께서 두 번을 세셨습니다. 세 번째는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행랑 끝에서 찬바람이 한 번 꺾여 들어왔다. 벽등 불꽃이 누웠다가 섰다.
"세는 걸 알았나."
"…예."
"거짓 하나 덜자고, 도둑을 찾는 줄에서 그 창을 내놓았군. 그 창이 너를 어디에 세우는지 알면서."
그가 말을 멈췄다. 다시 나온 목소리는 조금 낮았다.
"어제 그 말은 세지 않았다. 고향 말이라던 것."
목 안쪽이 한 번 조였다. 내 고향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말 하나만은 믿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의 창을 보았다. 불이 꺼진 창이었다.
"저 창 밑이 이 길이다. 어제도 오늘도, 쟁반이 이 밑을 지나갔다. 뚜껑 소리가 한 번도 서두르지 않더군."
나는 그 창을 올려다보지 않으려고 이틀을 돌아서 다녔다. 그사이 이 사람은 저 위에서, 창 밑을 지나가는 내 찻주전자 뚜껑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턱이 잔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었다. "김이 낮다. 식는 길로 왔다."
나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행랑의 찬 공기 속에서 김은 정말로 낮게 기어 있었다. 한 번도 입에 대지 않는 차였다. 그 차가 얼마나 따뜻한지를, 이 사람은 김의 높이로 재고 있었다.
"동쪽 회랑은 전하께서 지나시는 길입니다. 시녀는 전하의 길을 비켜 다닙니다."
법도대로 한 답이었다. 틀린 데는 없었다.
"사 년을 비켜 다녔으면, 그날 아침 그 회랑에 너는 없었겠지. 비켜 다니기 시작한 건 그다음 날부터다. 무엇을 비키지."
법도를 앞세워 막아 둔 자리 바로 뒤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더 물러날 데가 없었다. 등 뒤는 벽이었다.
"…고개를 든 자리라서입니다."
이번 침묵은 길었다.
"네가 비키는 길은 하나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 여기 섰다."
숨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는 그 말을 거두러 오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다가와 쟁반 위로 손을 뻗었다. 장갑 낀 손가락이 받침째 잔을 들어 올렸다. 셋째 칸, 왼쪽 둘째. 장부가 고른 잔이었다.
나는 소리를 기다렸다. 도자기가 받침 위에서 도는 소리였다. 첫날은 두 번이었다. 어제는 한 번이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잔을 돌리지 않았다.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잔을 기울였다.
찻물이 가는 줄이 되어 떨어졌다. 행랑 돌바닥 가운데에는 빗물 빠지는 홈이 길게 패어 있었다. 홈에 떨어진 차가 김을 한 번 확 피워 올리고는 어둠 쪽으로 흘러갔다. 찻잎 냄새가 찬 공기 속에 잠깐 짙어졌다가 흩어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떨어진 뒤에야 그가 잔을 바로 세웠다.
"벌은 하녀장이 내렸다."
빈 잔이 받침 위에 놓였다. 장갑 끝이 받침 가장자리에 머물렀다.
"나는 내리지 않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잔은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내가 쏟았다고 적히겠지."
"전하, 그 잔은—"
"장부가 고른 잔이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안다."
"…어째서입니까."
"왜냐고 묻는 건 내 쪽이다."
나를 감싼 것인지 시험한 것인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 행랑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장부가 고른 잔을 황태자가 제 손으로 버렸고, 그걸 본 눈은 내 것 하나였다. 오늘 밤부터 그 장부에는 그의 손이 적힌다. 그리고 그 손을 본 사람은 나다. 우리가 같은 줄에 묶였다는 걸, 나는 쏟아진 차의 김이 다 흩어지기도 전에 알았다.
그가 제복 앞섶을 열었다. 꺼낸 것은 반으로 접힌 쪽지였다. 어제 준비실에서 펼치지도 않고 품에 넣었던 그 쪽지였다. 번진 먹이 접힌 자리 바깥까지 배어 나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빈 잔의 받침 밑에 끼웠다.
"빈 잔은 준비실로 돌려라. 그대로."
내 눈은 받침 가장자리의 그 장갑에 걸려 있었다. 검은 가죽 안에서 손가락 마디가 한 번 굽었다가 펴졌다. 여든여드레 뒤에는 검자루를 쥘 손이었다. 원작 1화 아래 달린 댓글 하나가 혀끝까지 올라왔다. 두 번째 댓글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이 들어 있던 줄.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목덜미로 찬 기운이 내려갔다. 그런데 귀 끝은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둘이 한꺼번에 와서 숨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가 먼저 눈을 돌렸다. 머리 위의 창 쪽이었다.
"그 정원은 밤에 아무도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걷는다. 그 창에 사람이 선 건, 오랜만이다."
그 말끝에서 그가 굳었다. 받침에서 떨어지던 장갑이 반 뼘 허공에서 멈췄다. 창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숨이 늦게 왔다. 오랜만이라는 말 뒤에 할 말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시녀도 그 창 앞에 섰을까. 그리고 이 사람은 정원에서 그 시녀를 올려다보았을까.
"내일부터는 마르테가 올린다지."
말머리가 너무 빨리 바뀌었다.
"예, 전하."
"마르테는 잔을 비추나."
"…하녀장님께 배운 대로 올릴 겁니다."
"하녀장은 비추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멈췄던 손이 그제야 내려왔다. "오늘 밤, 그 창은."
"…서지 않겠습니다."
"왜지."
대답이 목까지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쟁반 손잡이와 함께 꽉 쥐었다. 그가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무슨 말이 더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벽 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시녀가 돌아설 자리를 비켜 준 것이었다. 황태자가.
물러가라는 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돌아섰다. 모퉁이를 돌 때까지 등 뒤의 그 사람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비실로 돌아온 빈 잔은 소년이 받았다. 소년은 잔 안을 들여다보고, 받침을 들어 올리고, 그 밑의 접힌 종이를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눈이 무엇을 적어 갈지는 알 것 같았다. 브리타의 행주는 탁자 위에서 멈춰 있었다.
그날 밤에는 서쪽 회랑에 가지 않았다. 손등에 기름을 바르고 등잔을 끈 뒤, 창이 하나도 없는 숙사 벽을 보고 누웠다. 정원에서는 오늘 밤에도 그 걸음이 돌고 있을 것이다. 비어 있는 창을 올려다보면서.
이튿날 새벽에도 쪽문 앞에 줄이 섰다. 수저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로슈 경의 손가락은 넷에서 멈췄다.
"넷. 창은."
"서지 않았습니다. 서면 보이니까요."
어젯밤 그 사람에게 끝내 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로슈 경의 눈썹이 한쪽만 올라갔다. "짧네. 어제만큼." 그가 쪽문 안쪽으로 턱짓을 했다. "통과. 그리고 시녀님, 오늘부턴 줄 끝나면 준비실에서 쟁반 받아서 동쪽 회랑 끝 방으로 가요. 전하가 아침 드시는 방."
"…예? 오늘부터는 마르테가—"
그의 웃음이 얕아졌다.
"전하가 너를 아침 다과에 붙이라더군."
그러고는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겼다. 웃음기를 빼고, 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냈다.
"'김이 낮은 잔은 받지 않는다. 동쪽으로 오게 해라.'"
받지 않는다니.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은 잔을. 어젯밤에는 받아서 쏟아 버린 잔을.
준비실의 소년이 오늘도 쪽지를 읽었다. "동궁 아침 잔. 넷째 칸, 첫째." 같은 붉은 인이었다. 브리타가 물을 부었고, 김이 곧게 올라갔다. 그다음에 행주를 쥔 주근깨 난 손이 잔으로 왔다. 그저께는 금테 한 뼘 앞에서 멈췄던 손이었다. 오늘은 멈추지 않았다. 행주 자락이 금테를 한 바퀴 훔쳤다.
"…김이 서려서요."
이번에는 정말로 김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더 차가웠다.
나는 잔을 들어 화덕 불빛에 기울였다. 금테가 불빛을 받아 한 바퀴 둥글게 빛났다. 그런데 한 군데, 손톱만 한 자리에서 그 윤이 끊겼다. 그저께 준비실 햇빛 속에서 그 사람이 찾던 자리였다. 끊긴 데는 없다고, 그때 그는 말했었다.
김 때문일 수도 있었다. 행주가 지나간 자국일 수도 있었다. 잔을 조금 더 기울였다. 김이 다시 서리면서 끊긴 자리가 흐려졌다. 정말 끊긴 건지 아닌지,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새로 따르겠습니다."
브리타의 손이 행주를 움켜쥐었다. 나는 끓는 물을 국자로 떠서 잔을 안팎으로 헹구고, 주전자의 차를 다시 따랐다. 소년이 쪽지에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어젯밤 빈 잔을 받던 그 눈이었다. 알면서도 손을 멈출 수는 없었다.
헹구는 사이 김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올랐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쟁반을 들고 갈림목에 섰다. 오른쪽은 북쪽 행랑이었다. 어젯밤 그 사람이 서 있던 길, 차가 홈을 따라 흘러간 길이었다. 왼쪽은 동쪽 회랑이었다. 내가 이틀 동안 돌아서 피한 길이었다. 그 끝에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비켜 다닌 걸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센 사람이.
김이 식기 전에 닿아야 했다. 시중드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나는 왼쪽으로 돌았다.
첫걸음이 대리석에 닿는 순간,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눈앞에 창이 떴다.
배역: 동궁 소속 시녀 리네트. 비고: 달의 연회 시중. 아침 다과 시중. 3화에서 퇴장.
줄이 하나 늘었다. 끝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끝의 '3'이 깜박였다. 한 번, 숨을 고르듯이.
대리석 위로 내 발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하나씩 떨어졌다. 어느새 한 걸음이 다음 걸음을 밟고 있었다. 찻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한 번, 또 한 번. 창 밑을 지날 때는 한 번도 서두르지 않던 소리였다. 쟁반 위에서 곧던 김이 뒤로 눕기 시작했다. 나는 쟁반을 고쳐 쥐었다. 김은 누운 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첫날 아침 고개를 든 자리를 지났다. 대리석 바닥에는 아무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회랑 끝 방의 문이 안에서 열렸다.
나온 사람은 시종장 발렌이었다. 덮인 장부를 가슴께에 받쳐 들고 있었다. 내 걸음이 저절로 멎었다. 갑자기 멈춘 쟁반 위에서 김이 앞으로 쏠려 엎어졌다.
그는 문을 등 뒤로 닫으며 내 쟁반을 보았다. 김이 아니라 잔을 보았다.
"리네트 시녀. 넷째 칸, 첫째였지요." 웃음 대신 소리 없는 숨이 한 번 지나갔다. "어제 셋째 칸 잔은, 빈 채로 돌아왔더군요."
그가 걸음을 뗐다. 내 곁을 지나며, 나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게 말했다.
"장부에 두 줄 오른 시녀가, 전에도 있었지요."
발소리가 회랑 저편으로 멀어졌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멈춰 선 쟁반 위에서 김이 천천히, 다시 곧게 일어섰다.
닫힌 문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김."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