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에서 퇴장
"리네트. 일어나, 리네트! 전하 지나가실 복도, 오늘은 우리 차례라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흔들리는 어깨는 내 것이었다. 눈을 뜨자 어디선가 종이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났고, 허공에 글자가 떴다.
배역: 동궁 소속 시녀. 비고: 3화에서 퇴장.
무슨 뜻인지 알았다.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휴대폰 불빛 아래서 끝까지 읽은 소설이었다. 원작 3화는 달의 연회 밤이고, 이 궁의 시간으로 아흔 날 뒤다. 그 밤 황태자의 잔에 독이 든다. 그 잔을 올린 이름 없는 시녀 A는 그 자리에서 황태자의 검에 베인다. 원작은 그 죽음을 두 줄로 끝냈다. '잔을 올린 시녀가 무릎을 꿇기도 전에 검이 지나갔다. 황태자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새 잔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 시녀가 나였다.
그 두 줄짜리 죽음에 나는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저 시녀 이름이라도 있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달았는데, 그 줄에는 그 남자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지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줄이었다. 대신 이건 분명히 알았다. 그 잔에 독을 넣은 손은 시녀 A가 아니었고, 끝내 잡히지 않았다. 잡힌 건 시녀 A의 목뿐이었다. 살고 싶으면 아흔 날 안에 그 남자의 칼끝에서 비켜나야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는 바로 그 남자가 지나갈 복도를 닦으러 가야 했다.
앞치마는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다. 풀 먹인 무명에서 쌀 삶은 물 냄새가 났다. 끈을 묶는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단단했다. 걸레를 오래 쥔 사람의 손이었다. 내 손이 아닌데도 끈 묶는 순서는 손이 먼저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사는 동궁, 그 동쪽 회랑의 대리석은 아침에도 차가웠다. 시녀 여섯이 벽을 따라 무릎을 꿇고 물 먹인 걸레로 바닥을 밀었다. 나를 깨운 시녀가 옆에서 속삭였다.
"전하 오시면 이마를 바닥에 붙여. 눈 마주치면 그날로 끝이야."
끝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우스웠다. 나는 이미 끝이 정해진 사람이었다.
회랑 끝에서 발소리가 들어왔다. 둘이었다. 하나는 쇠붙이가 가볍게 부딪히는 걸음이었고, 하나는 소리가 거의 없는 걸음이었다. 말소리가 먼저 닿았다.
"시종장이 벌써 달의 연회 장부를 펼쳤답니다. 자리 배치까지 다 짰다던데요."
넉살 좋은 목소리였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그보다 한참 낮았다.
"시종장은 늘 이르다. 그래서 그의 장부는 틀린 적이 없지."
"틀린 적 없는 장부라. 저는 그게 더 으스스하던데요."
"그러니 읽어 두는 거다. 한 줄도 빼지 않고."
나는 걸레를 쥔 채 숨을 멈췄다. 그 밤 저 목소리가 시녀 A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원작에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발소리가 내 앞에서 멎었다.
이마를 바닥에 붙여야 했다. 옆의 시녀들은 정말로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벨 사람의 얼굴은 한 번쯤 봐 둬야 하지 않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잿빛 눈이었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짙은 감색 제복의 깃을 따라 은사 수가 서늘하게 흘렀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키가 커서 나는 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밤을 새운 사람처럼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 세드릭 발크레아였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화도 놀람도 없었다. 바닥의 얼룩을 보듯 나를 보았다. 등 뒤의 기사 쪽에서 칼집이 한 번 덜컥 울렸다.
"고개를 드는 시녀는 오랜만이군."
한 박자. 아니, 두 박자가 지났다.
"이름이 뭐지."
끝을 올리지 않는 말이었다. 묻는 게 아니라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리네트입니다, 전하."
"…그런가."
그게 다였다. 그는 다시 걸었다. 기사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하자 낮은 목소리가 그 말을 잘랐다.
"하녀장 몫이다. 가지."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쉬었다. 무릎 밑의 대리석이 축축했다.
원작에서 시녀 A의 이름을 물은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도.
하녀장 처소에서는 밀랍과 마른 라벤더 냄새가 났다. 그레텔 하녀장은 쉰을 훌쩍 넘긴 사람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허리춤의 열쇠꾸러미가 짤랑거렸다.
"하녀장님, 아침 일은 제가…"
"됐고, 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트인 손등을 엄지로 쓸어 보고 혀를 차더니, 서랍에서 기름 먹인 연고 단지를 꺼내 듬뿍 발랐다. 야단은 그다음이었다.
"시녀는 황족께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눈도 맞추지 않는다. 허나 너는 고개를 들었다. 이 궁에선 그 하나로 매를 맞고, 그 하나로 숙사에서 짐을 싼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연고를 문지르는 엄지도 멈추지 않았다.
"마르테가 열이 올라 누웠다. 오후 다과 시중은 네가 들어라. 서재다."
서재. 시녀가 황태자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바닥만 보면서 계산했다. 쫓겨나서 살 수는 없다. 원작의 시녀 A는 끝까지 동궁에 있었고, 각본은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였다. 잔이 오는 길. 원작에서 독은 준비실에서 흘러들어 그의 손에 닿을 때까지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 길 어딘가를 내 손으로 끊는다.
"…예, 곧 올리겠습니다."
"또 오늘처럼 고개를 들면, 그땐 나도 못 막는다." 그녀가 연고 단지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리네트. 시중 자리에서 무슨 일이 나거든, 남의 입보다 네 입으로 먼저 나한테 와라. 알겠느냐."
열쇠꾸러미가 한 번 짤랑, 하고 그녀의 손에 움켜쥐어졌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다과 준비실은 김으로 뿌옜다. 구리 주전자가 화덕 위에서 낮게 끓었고, 금테 두른 흰 찻잔이 선반에 줄지어 엎어져 있었다. 그 옆 자줏빛 벨벳 상자 안에 은수저가 누워 있었다. 원작에서 독은 이 방에서부터 흘러들었다.
내 옆에서 주근깨 난 시녀가 잔을 쟁반에 엎었다가 바로 세웠다. 손이 빨랐다. 지나치게 빨랐다.
"기미는 건너뛰자. 어차피 전하는 안 드셔. 늦으면 둘 다 혼나."
그녀가 쟁반을 들려 했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 쟁반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건, 순서가 아닙니다."
그녀가 움찔했다. 동그란 눈이 나를 보다가 벨벳 상자로, 다시 문간으로 갔다.
"…언니 오늘 왜 이래. 얼굴도 하얗고."
"괜찮아요, 진짜로."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궁에서 쓰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은수저를 꺼내 차에 담갔다. 은이 검게 변하면 독이고, 그 잔을 나른 손이 가장 먼저 끌려간다. 셋을 셌다. 은은 하얬다. 누가 "브리타" 하고 그녀를 불렀다. 브리타는 대답도 없이 행주를 집어 들었다.
"아침엔 동쪽 회랑이더니."
문간에 누가 기대 서 있었다. 아침의 그 기사였다. 가벼운 제복에 허리에는 검을 찼고, 웃고 있었다.
"전하가 이름을 물으신 시녀가, 오후엔 다과 시중까지 드시네. 하루가 바쁘시네요, 시녀님." 웃음 섞인 숨 끝에 말이 뚝 떨어졌다. "…이름이 뭐랬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대답이 길어지면 더 캐물을 눈이었다.
"리네트입니다, 경."
"로슈 단. 전하 호위." 그가 문틀에서 등을 뗐다. "서재까지 모셔다 드리죠. 영광으로 아세요." 그러다 웃음기가 싹 빠졌다. "농담이고. 앞장서."
쟁반을 들고 걸으면서 나는 셌다. 준비실 문을 나서면 첫 회랑, 내전으로 꺾이는 문, 두 번째 회랑, 그리고 서재 앞의 문. 회랑 둘에 문 셋. 원작은 이 길을 한 줄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길은 아직 아무도 쓰지 않은 페이지였다.
황태자의 서재는 낮인데도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등잔 셋이 켜져 있었고, 잉크와 식은 밀랍 냄새가 났다. 넓은 책상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일정하게 났다.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등잔 불이 그의 한쪽 얼굴만 비추고 있었다. 곧게 편 등, 목까지 채운 감색 깃. 서류를 넘기는 장갑 낀 손가락이 길었다. 로슈가 책상 옆에 서류 한 묶음을 내려놓았다.
"시종장 쪽에서 연회 경비가 올라왔습니다. 전하 결재보다 하루 빠릅니다."
"또인가." 서류가 한 장 넘어갔다. "경비는 늘 맞는다. 맞지 않는 건 사람이지. 연회 밤 내 잔을 들 손도, 이번엔 그가 고른다지."
"예. 시중 명단은 시종장 장부로 올라간답니다."
로슈의 눈이 나를 한 번 스쳤다. 시녀 앞에서 할 말이냐는 눈이었다. 세드릭은 고개도 들지 않고 그 눈빛을 읽었다.
"시녀는 가구다. 가구 앞에서 말을 가릴 까닭은 없다. 계속해라."
가구는 베이지는 않지요, 전하. 나는 쟁반을 책상 모서리에 내려놓았다. 가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두고 가라."
여기서 물러나면 됐다. 원작의 시녀 A라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잔을 집어 들어 등잔 불빛에 비췄다.
금테가 번들거렸다. 흰 자기 안쪽, 테두리를 따라 둥글게 윤이 돌았다. 무언가 발린 자리가 있다면 그 윤이 거기서 끊길 것이다. 고르게 돌았나. 고른 것 같았다. 일단, 확인.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무엇을 하는 거지."
"잔을 보았습니다, 전하."
"잔에서 무엇을 보았지."
"금테의 윤기를 보았습니다."
"윤기." 그가 그 낱말을 한 번 굴려 보았다. "윤기를 보는 시녀는 처음이군."
처음이시겠죠. 원작에는 잔을 들여다본 시녀가 한 줄도 없었으니까.
"고르지 않았다면."
"새 잔을 올렸을 겁니다."
"그 잔을 나른 시녀는."
"…가장 먼저 의심받겠지요."
"알면서 비췄군. 의심을 제 손으로 불러들이면서."
대답 대신 나는 잔을 쟁반에 되돌려 놓고, 벨벳에 싸 온 은수저를 차에 담갔다. 은수저 끝이 찻물 속에서 흐리게 휘어 보였다. 꺼냈을 때도 은은 하얬다. 나는 수저를 거두고 쟁반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물러날 채비였다.
"기미는 준비실에서 끝났을 텐데."
"한 번 더 했습니다. 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그의 몸이 내 쪽을 향했다. 등잔 불이 이제 그의 얼굴 전부를 비췄다.
"준비실에서 한 번. 내 앞에서 한 번. 같은 잔에 두 번." 그는 말끝에 침묵을 남겼다. 나더러 채우라는 침묵이었다. "준비실의 너를, 내 앞의 네가 믿지 못한다는 뜻인가."
"…잔이 오는 길이 깁니다, 전하."
그의 장갑 낀 손가락이 내려놓은 펜 위에서 멎었다.
"…길다." 그가 낮게 되뇌었다. "준비실에서 여기까지, 회랑 둘에 문이 셋이다."
숨이 걸렸다. 쟁반을 들고 오면서 내가 센 숫자였다. 걸레질하는 시녀와 서류를 넘기는 황태자가 같은 길을 같은 숫자로 세고 있었다.
"그 길 어딘가에서 잔이 바뀌면, 마지막에 잔을 든 손이 값을 치른다." 잿빛 눈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너는 그걸 아는 얼굴이다. 어디서 배웠지."
"배운 적은 없습니다."
"배운 데 없이 손이 먼저 가나."
끝까지 읽어서요, 전하. 당신이 그 손을 어떻게 끝내는지까지. 그 말은 속에서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대신 쟁반을 거두려고 손끝에 힘을 주었다.
쟁반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장갑 낀 검지로 쟁반 가장자리를 짚고 있었다. 내 손끝에서 한 마디 떨어진 자리였다. 은사로 수놓은 소매 끝이 등잔 불빛을 받아 희게 번들거렸고,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났다. 등잔 셋이 다 켜져 있었는데, 뜨거운 건 그 한 마디 쪽이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는 손을 거두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침묵이 길었다. 그러다 그가 아주 낮게 말했다.
"기억해 두지."
손가락이 쟁반에서 떨어졌다. 그가 받침째 잔을 제 앞으로 옮겼다. 잔을 들었다가 받침에 내려놓으며 한 번 돌렸다. 도자기가 받침을 긁는 소리가 났다. 다시 한 번, 똑같은 소리.
그는 잔에서 손을 뗐다. 마시지 않았다.
알고 있던 일이었다. 십이 년 전 황후가 독살당한 뒤로, 그는 남의 손을 거친 잔을 절대 먼저 마시지 않았다. 궁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버릇이었다. 그런데 글로 읽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달랐다. 두 번 도는 그 소리는, 네 손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아주 정중하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빈 쟁반을 거두어 가슴께에 안았다. 그런데 그의 눈은 잔에 있지 않았다. 잔 너머, 쟁반 가장자리를 쥔 내 손끝에 있었다. 로슈가 서류를 한 장 넘길 때까지도 거기 있었다.
"마시는 걸 보려고 기다리나."
"아닙니다, 전하."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시녀는, 이 궁에서 오래 가지 못한다."
알아요, 전하. 아흔 날이요.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로슈가 헛기침을 했다. "전하, 이러다 이 시녀가 겁먹고 쟁반 떨어뜨립니다." 그가 문 쪽으로 턱짓을 했다. "시녀, 이만 나가 봐."
"두어라."
한 마디였다. 로슈가 문고리 쪽으로 가던 걸음을 멈췄다.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손을 봐라. 겁먹은 손은 등불 앞에서 먼저 떤다. 이 손은 잔을 비출 때도 떨지 않았다." 반 박자가 비었다. "다만 등잔을 등지고 섰지. 네 그림자가 금테 절반을 덮었다. 다음에 비출 거면 불 쪽으로 서라."
고른 것 같았다고 넘긴 그 절반을, 그는 보고 있었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그리고 다음이라고 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보면 그때부터 떨릴 것 같았다.
"아침 그 복도의 시녀랍니다. 이름이 리네트라고…"
"안다." 로슈의 말이 잘렸다. "아침에 물었다."
잿빛 눈이 다시 나에게 왔다.
"그때도 시키지 않았는데 고개를 들었지. 왜지."
나를 벨 얼굴을 봐 두고 싶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나가시는 분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동궁 시녀가, 동궁 주인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집어 든 서류 한 장이 반쯤 들린 채 멎었다. 그는 그 장을 넘기지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내 거짓말도 그렇게, 뒤집어 보지 않고 내려놓았다.
"…그런가."
아침과 똑같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세 걸음. 문고리에 손이 닿았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왔다.
"시녀."
나는 멈췄다. 돌아보면 안 됐다. 그래서 기다렸다. 등잔 심지 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긴 침묵이었다. 무언가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었다.
"…됐다. 물러가라."
그는 내 이름을 알았다. 방금 안다고 했다. 그런데 부르지 않았다. 부르려다 삼킨 그 말을, 나는 등으로 들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틈으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로슈. 저 시녀, 누구 줄인지 알아봐라. 시종장 장부부터."
"이름 하나 물으시더니 일이 커지네요."
"이름을 물은 건, 그래서다."
"그럼 아까 손은요. 그것도 그래서 보신 겁니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문이 먼저 닫혔다.
복도의 공기가 차가웠다. 쟁반을 쥔 손가락 끝이 시렸다. 한 마디 떨어져 있던 그 자리만 아직 뜨거웠다.
저녁의 세답방은 하얀 숲이었다. 줄마다 널린 홑청이 바람에 펄럭이고, 잿물 냄새와 김이 그 사이를 떠다녔다. 황태자가 고개 든 시녀의 이름을 물었다는 말은 해가 지기도 전에 홑청 끝까지 와 있었다. 원작에는 없던 소문이었다.
빨랫줄 끝에서 브리타가 젖은 앞치마를 급히 걷어 갔다. 걷히는 자락 끝에 자줏빛 보풀이 몇 올 붙어 있었다. 준비실에서 은수저가 누워 있던, 그 벨벳 상자의 색이었다. 오늘 그 상자를 연 손은 내 손 하나여야 했다. 주근깨 난 옆얼굴이 홑청 사이로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종이 한 장 넘어가는 소리. 비고란은 아침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서쪽 회랑을 지난다. 해가 진 대리석은 아침보다 더 차가웠고, 벽등이 띄엄띄엄 켜져 있었다. 회랑 창 너머 서재 쪽 커튼 틈에 아직 불빛이 걸려 있었다. 그 뒤에서 그는 아직 종이를 넘기고 있을 것이다. 들릴 리 없는 거리였는데, 귀가 먼저 그 소리를 찾았다.
기억해 두지. 그 낮은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그가 정말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책으로 읽어서 알았다.
그러다 알아차렸다. 회랑에는 내 발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소리 없이 누가 와 있었다.
"리네트 시녀."
나이 든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정중한데 온기가 없었다. 벽등 아래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검은 예복에 얇은 장갑을 끼고, 두꺼운 장부를 방패처럼 가슴께에 받쳐 들고 있었다.
시종장 발렌이었다. 궁의 살림과 연회 자리를 쥔 사람, 누구에게나 공정해 보이는 궁의 큰어른이었다. 원작 3화, 그 밤의 연회 자리를 짠 손이었다. 그 장부 뒤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원작을 끝까지 읽은 사람만 안다. 나는 끝까지 읽었다. 증거가 없을 뿐이었다.
"오늘 전하의 다과 시중을 드셨다지요. 준비실에서는 기미 순서를 바로잡으셨다고요."
준비실에서 그 말을 들은 귀는 많지 않았다.
"서재에서는, 전하께서 무어라 하시던지요."
"…두고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셨겠지요." 그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법도가 그러합니다. 시중든 손은, 장부에 남지요."
그가 장부를 펼쳤다. 장갑 낀 손가락이 한 줄을 짚었다. 서두르지 않았다.
"달의 연회 시중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려 두었습니다."
숨이 얕아졌다. 침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물론, 장부에 적힌 대로입니다만."
그는 소리 없이, 숨으로만 웃었다.
장갑 낀 손가락 밑의 그 줄에 내 이름이 있었다. 시종장의 장부였다. 닫히던 문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저 시녀, 누구 줄인지 알아봐라. 시종장 장부부터.
내일 로슈가 펼칠 장부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방금, 정말로 시종장의 줄이 되었다.
그가 끝내 부르지 않은 내 이름을, 그는 시종장의 줄 위에서 처음 읽게 될 것이다. 아흔 날 뒤 제 잔을 올릴 손의 자리에서.
1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