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대의 새벽
그 밤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문이 하룻밤 재워 준 골방이었다. 저녁에 협약청 관리가 와서 이 방을 아예 내 방으로 정했다고 일러 주고 갔다. 처형 전날 밤에 생긴 방이었다. 지붕을 내주고 새벽에 이름을 받아 가려는 거겠지. 신분도 보증인도 없는 사람한테는 그거면 된다고 본 거다.
초에 불을 붙이고 벽 앞에 앉았다. 짐승이 한 말이 적혀 있고, 그 옆마다 협약청이 받아 간 말이 다른 손으로 붙어 있는 벽이었다.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소리 내어 읽었다.
"물이 필요하다." 그 옆은 이랬다. "짐승이… 자백함."
다음 줄 옆도, 그다음 줄 옆도 같은 손이었다.
"…여기도, 자백함."
목이 굳었다. 세다가 스물을 넘기고 그만두었다. 천장 가까운 맨 윗줄, 손톱으로 겹겹이 긁어 놓은 그 한 줄만은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 삼십 년 전 들은 그대로 적었다는 여문의 한 줄이 저기 있는지, 나는 몰랐다.
책상 모서리에도 날카로운 것으로 몇 번이나 되짚어 긁은 글씨가 있었다.
제칠조. 짐승의 처형은…
그 뒤는 닳아서 읽히지 않았다. 그 아래에 더 작고 급한 글씨가 또렷했다.
그래서 나를 막았구먼.
여문의 말투였다.
"짐승의 처형은… 뭐라는 거야?"
대답 대신 창밖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쇠창살 너머 안개 속에 연둣빛 두 점이 떠 있었다. 어젯밤보다 가까웠다.
"인간… 큰 나무, 섰어. 그분 앞에." 붙어 있던 귀가 더 납작해졌다. "그분… 죽어? …죽어?"
아직은, 이라고 말하려 했다. 어젯밤처럼.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말이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새벽까지 남은 시간은 '아직'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았다.
"…모르겠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연둣빛 눈이 한참 나를 보다가 안개 속으로 꺼졌다. 멀리 뜰에서 사슬이 한 번, 길게 울렸다.
바람이 굴을 등지면. 새벽에 내가 쥐고 나갈 수 있는 건 그 옛말 하나뿐이었다.
창밖이 푸르스름해질 무렵 문이 두드려졌다. 여문이 아니었다.
"통역사, 나오시오. 때가 됐소."
뜰은 이미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성 밖 마을에서도 왔다고 했다. 사람들 입김이 하얗게 섞여 올라갔다. 안개 위로 처형대가 솟아 있었고, 그 옆에 자루가 내 키만 한 도끼가 세워져 있었다.
맨 앞줄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팔에 검은 천을 감고 대여섯 살쯤 된 사내아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떠들지 않았다. 사슬이 놓인 자리만 보고 있었다. 서른 명. 그 숫자 안에 저 여자의 누군가가 있었다.
"온 도시가 다 나왔군, 통역사."
베인이 단상 그늘에서 나왔다. 구경 나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늘은 들을 것도 없네. 다 적어 뒀으니, 펜만 들면 되지."
"베인 감독관님… 루가르는요?"
"저놈 걱정은 말게." 그가 가볍게 웃었다. "오늘로 끝이니까."
병사 여섯이 사슬을 당겼다.
그가 일어섰다. 앉은 모습만 봤던 나는 그제야 그가 얼마나 큰지 알았다. 곧게 선 어깨가 처형대 발판보다 높았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물러섰고 어디선가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디딜 때마다 발밑의 돌이 떨렸다.
"통역사는 죄인 옆에 서시오. 마지막 말을 옮기는 자리요."
병사에게 등을 떠밀려 판을 안고 그의 곁으로 갔다. 쇳소리 사이로 낮은 울림이 내려왔다. 한 걸음 옆의 병사조차 짐승의 숨소리로만 들었을 만큼 낮았다.
"사슬이 네 발에 감긴다. 반 걸음 떨어져라."
반 걸음 물러섰다. 방금 내 발이 있던 자리를 사슬이 긁고 지나갔다.
"지금 내 말을 듣는 것은, 너 하나다."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앞만 보고 있었다. 목의 흉터가 새벽빛에 하얗게 드러났다.
"…무섭지 않아요?"
작게 물었다. 병사들 눈에는 혼잣말로 보였을 것이다. 한참 뒤에 대답이 왔다.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한 걸음.
"그러니 대답하지 않겠다."
안 무섭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맨 앞줄을 지날 때 그의 콧김이 길게 빠졌다.
"앞줄의 여자에게서 잃은 냄새가 난다."
"…서른 명 중에, 누군가겠죠."
"저 여자는 나를 본다. 볼 곳이 나밖에 없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자의 눈길을 그대로 받으며 한 걸음씩 지나갔다. 걸음마다 발밑의 돌이 떨렸고 그 떨림이 내 정강이를 타고 올라왔다. 변명도 사과도 아니었다. 그 슬픔이 거기 있다는 걸 짐승의 방식으로 받아 내는 걸음이었다. 목이 메어서 엉뚱한 것을 물었다.
"그 밤, 정말…"
"들은 것을 다시 묻지 마라." 그가 짧게 끊었다. "너는 들었다."
입이 닫혔다.
"들은 것을 어떻게 할지는, 네 손이 정한다."
처형대 계단 앞에서 그가 멈췄다. 병사들이 사슬을 계단 옆 기둥 고리에 거는 사이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내 쪽으로, 아주 깊이. 더운 숨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첫날 밤처럼. 비에 젖은 숲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몄다.
"내 말을 듣는 작은 것."
그 숨과 함께 떨어진 말이었다. 처음 듣는 호칭이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옆에서 나는 정말 작았다. 그런데 얕보는 결이 없었다. 나를 가리키는 가장 정확한 이름 같았다.
"오늘 네가 판에 무엇을 적든, 나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그 줄을 적으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떻게 되는데요?"
"저 나무 위에서 내 목이 떨어진다. 너는 지붕을 얻는다. 그뿐이다."
"그뿐이라뇨…"
"사슬에 걸린 날부터, 이 나무가 서리라는 것은 알았다. 오늘 내가 모르는 것은 네가 무엇을 적느냐 하나다."
위로가 아니라 허락이었다. 그 허락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사슬이 고리에 걸렸다. 그는 고개를 들기 전에 한 마디를 더 내려놓았다.
"앞의 것들은 적고 나서, 나를 보지 않았다."
어젯밤 벽에 줄지어 있던 '자백함'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한 박자가 지났다.
"적어라. 나는 보지 않겠다."
그때는 그 말뜻을 몰랐다.
마른 서기가 단상에 올라 두루마리를 끝까지 펼쳤다. 절차를 하나도 건너뛸 줄 모르는 손이었다. 그 목소리가 안개를 뚫었다.
"경계도시 무리스, 협약청 이름으로 고한다. 성 안팎의 무리스 사람들은 들으라. 휴전 협약에 따라, 재앙수의 처형을 집행한다."
군중이 환호했다. 서기가 손을 들어 가라앉혔다.
"휴전 협약, 제칠조. 짐승의 처형은, 통역사가 들은 말을 제 손으로 적고 서명한 자백으로만 집행한다."
숨이 멎었다.
책상에서 닳아 읽히지 않던 그 한 줄이었다. 내가 서명하지 않으면, 처형도 없다. 베인이 제 손으로 판에 써 넣은 줄로는 모자랐던 거다. 날 고른 것도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나를 막았구먼. 책상 글씨가 그제야 읽혔다.
"통역사, 앞으로."
베인이 단상 옆에서 웃으며 불렀다. 손에 양피지 한 장과 펜이 들려 있었다. 계단 세 칸이 아주 길었다.
베인이 양피지를 펼쳐 소리 내어 읽었다.
"다 적어 뒀네. 재앙수가 마을을 덮쳤다. 서른 명을 죽였다. 자백한다." 그가 맨 아래를 손끝으로 짚었다. "판 말고 이 양피지에. 맨 아래, '자백한다' 그 한 줄만 자네 손으로 다시 쓰고, 이름을 쓰게. 자, 펜."
판은 소매로 지워진다. 잉크는 지워지지 않는다. 펜을 받았다. 판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가 몸을 기울였다. 군중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여기 서명하게, 하린. 자네가 들은 말이지. 그렇지?"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은 이름이 아니라 손잡이 같았다.
군중 맨 뒤 성벽 그늘에 지팡이 하나가 보였다. 여문이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맨 앞줄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부탁하는 눈이었다. 적어 달라고, 누군가의 탓이라고, 이제 끝났다고.
손이 떨렸다. 서울에서 나는 삼 년을 기다렸다는 고백을 '기다렸어' 한 마디로 잘랐다. 여기 서명하면 저 여자는 오늘 밤 조금은 잘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진짜로 죽인 누군가도 오늘 밤 편히 잘 것이다.
펜 끝이 양피지 위에서 멈췄다.
등 뒤에서 사슬이 울렸다. 돌아봤다. 루가르는 나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체념한 얼굴이 아니었다. 적어라, 나는 보지 않겠다. 그 말이 그제야 뜻을 가졌다. 내가 서명하는 걸 보지 않으려고 돌린 고개였다. 내가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그걸 알아 버린 순간 펜이 무거워졌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건… 제가 들은 말이 아닙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앞줄이 웅성거렸다. 베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걷혔다. 목소리가 낮고 느려졌다.
"통역사. 기록에 남는다는 걸…"
"알아요." 그를 보지 않고 서기를 보았다. "제칠조. 통역사가 들은 말을 제 손으로 적고 서명한 자백으로만. 맞죠?"
서기가 베인을 봤다가, 나를 봤다가, 두루마리를 봤다.
"…그렇소."
판을 들어 올렸다. 새벽빛이 비스듬히 비치자 베인의 반듯한 글씨 아래로 다른 획이 떠올랐다. 분필이 부러질 만큼 꾹 눌러 써서 판에 팬 내 글씨였다.
첫날 밤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워진 건 판이다. 네가 적은 건… 안 지워졌다. 글자 그대로였다.
"제가 들은 건 이겁니다. 그 밤, 그 자리에 없었음. 무리의 어린 것들을 지키고 있었음." 숨을 한 번 쉬었다. "저는, 제가 들은 것에만 서명합니다."
뜰이 뒤집혔다. "통역사가 짐승 편을 드네!" "홀렸다!" 돌멩이가 계단으로 날아왔다. 나도 모르게 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돌이 판 테두리를 때리고 튕겨 나갔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사슬이 끝까지 당겨졌다.
쇠고리가 비명처럼 울었다. 기둥이 삐걱 기울었다. 고리에 묶여 있던 거대한 몸이 사슬 길이만큼 앞으로 나와, 계단 위 발판 끝에 선 나와 돌을 쥔 군중 사이에 벽처럼 섰다. 앞줄이 한꺼번에 움찔 물러섰고 날아오던 돌이 멎었다. 다들 짐승이 날뛰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포효도 말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알았다. 그가 막아선 건 도끼 앞이 아니라, 내 앞이었다.
사슬이 천천히 풀렸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멎은 뜰에서 맨 앞줄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소리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잘 들렸다.
"그럼 우리 애 아빠는, 누가 죽였어요?"
대답하지 못했다. 몰랐으니까. 내가 아는 건 이 짐승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 뒤로 숨었다. 나는 그 작은 손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베인의 웃음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얇았다.
"들었나, 서기. 통역사도 모른다는군." 그가 군중 쪽으로 반쯤 돌아섰다. "어린 것들을 지켰다?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그건 끝내 입을 닫았지. 말 못 하는 건 숨기는 거야. 통역사, 그 침묵을 들은 대로 적게. 그것도 들은 거니까."
목이 바짝 말랐다. 숨은 곳을 말하지 않는 걸 자백으로 적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제칠조도 그의 편이 된다.
"침묵이 아니었어요." 베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옛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들린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바람이 굴을 등지면, 이빨은 누구를 향하느냐."
뜰이 술렁였다. 짐승이 무슨 수수께끼를, 하는 웃음도 섞였다.
"그것은 물음이오." 서기가 건조하게 말했다. "자백이 아니오."
"네. 그리고 제 풀이는 하나예요. 이빨은 밖을 향합니다. 지키려고." 판을 쥔 손에 땀이 뱄다. "제가 들은 말 어디에도, 마을로 갔다는 말은 없습니다."
서기가 두루마리 끝에 펜을 댔다.
"통역사가 들은 말로 적어 두겠소. 물음 하나, 그리고 통역사의 풀이 하나."
양피지 모서리를 쥔 베인의 손가락이 멈췄다.
계단 아래에서 사슬 소리가 뚝 끊겼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가 반 박자 늦게 돌아보았다. 호박색 눈이 나에게 와서 멈췄다. 밤새 내 입속에서만 굴리던 말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왔다. 그런데 이 뜰에서 그 말을 알아들은 건 그와 나, 둘뿐이었다.
베인이 서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단상 위라 그 낮은 목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서기. 처형부터 하고, 서명은… 나중에 받아도 되지 않겠나."
"조문에, 그런 말은 없소."
베인이 아주 잠깐 멈췄다. 웃음이 돌아오기까지 한 박자가 걸렸다. 그 한 박자 동안, 저 사람도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서기가 두루마리를 말았다.
"통역사의 서명이 없으므로, 오늘의 처형은 집행하지 않는다. 재앙수의 처분은… 협약청 대심문에서 다시 정한다."
야유가 쏟아졌다. 베인이 발판에 떨어진 펜을 주워 들었다. 장갑 낀 손이 내 손을 펴고 그 펜을 쥐여 주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감싸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잘했네, 통역사. 정말 잘했어."
그의 입이 귀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박하 냄새가 났다.
"그럼 대심문에서 보지. 그때는 자네가 먼저 묶일지도 모르고."
그는 계단을 내려가 멀어졌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 손에는 그가 쥐여 준 펜만 남았다.
맨 앞줄의 여자가 아무 소리 없이 아이 손을 잡아끌고 돌아섰다. 검은 천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보았다.
흩어지는 사람들 너머로 여문과 눈이 마주쳤다. 웃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삼십 년 전 들은 그대로 한 줄을 적었다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도 언젠가 이 계단 위에 섰을까. 물을 틈도 없이 그는 지팡이로 성벽을 한 번 짚고 돌아섰다.
딱.
손이 그제야 떨리기 시작했다. 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이 판에는 이제 지워지지 않은 한 줄과, 지붕을 건 새벽이 함께 적혀 있었다.
그 골방도, 이제 내 방이 아니겠지.
풀린 사슬을 끌고 뜰 안쪽으로 돌아가는 그의 곁에 섰다. 병사들은 사슬 끝만 쥐고 멀찍이 따라왔다. 다리가 풀려 걷기가 힘들었다.
"…옛말, 사람들 앞에서 꺼내서… 죄송해요."
"들린 대로 놓았다. 꾸미지 않았다." 사슬이 돌을 긁었다. "네 풀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맞다."
몇 걸음 뒤에 그가 다시 말했다.
"작은 것. 너는 방금, 네 지붕을 걸었다."
"알아요." 숨을 삼켰다. "…그래도, 또 그럴 거예요."
사슬이 몇 번 더 돌을 긁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빨리 왔다. 짧고 단단했다.
"그러지 마라."
"…뭘요?"
"오늘 같은 것을, 다시." 사슬이 한 번 울렸다. "너희는 그러다 버려진다. 무리에서 떨어진 것은, 겨울을 못 난다."
짐승 말을 너무 깊이 들으면… 사람들이 먼저 너를 버려. 골방에서 들은 말이 지팡이 소리와 함께 귀에 다시 울렸다. 말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둘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루가르 말은 다 들을게요." 앞만 보고 말했다. 그를 보면 울 것 같았다. "근데 그 말은… 못 들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았다고 하면 거짓이 되니까.
대신 그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다리가 풀린 내가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그의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열이 반 걸음 너머 내 뺨까지 왔다. 닿은 데는 없는데, 바람 부는 쪽이 막혀 있었다.
우리는 성벽 그늘 안으로 들어섰다. 해가 아직 넘어오지 않은 자리였다. 그의 큰 몸이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되고 호박색 두 점만 남았다.
"저자가 네 귀에 한 말을, 나도 들었다."
"…들으셨어요?"
"저자는 웃을 때 가장 낮게 말한다. 낮은 말은 내 귀에 더 잘 들린다."
"대심문이… 언제인지도 몰라요."
"나도 모른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
긴 틈이 있었다. 사슬 끄는 소리만 이어졌다. 그리고 으르렁거림이 걷힌 맨 저음이 어둠 속에서 왔다.
"…오늘 아침, 내 등 뒤에 있던 것은 너였다."
호박색 두 점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숨이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돌이 날아오던 발판 끝, 나와 군중 사이에 벽처럼 서던 어깨. 그는 그때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뒤에서 마른 발소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서기였다. 숨이 차서도 두루마리 끈부터 반듯하게 고쳐 매는 사람이었다.
"통역사. 절차대로, 지금 통지하오."
그가 접힌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펜을 쥔 손으로 받느라 잉크 냄새가 섞였다. 펼쳤다.
협약청 대심문. 이레 뒤 새벽, 협약청 대회랑. 피심문인 하나. 통역사 하린, 협약 서명 거부의 건. 피심문인 둘. 재앙수.
"감독관의 청으로 한 줄이 더해졌소. 조문에 어긋나지 않으니, 받았소." 서기는 그 말만 남기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사슬 소리가 내 옆에서 이어졌다. 낮은 울림이 내려왔다.
"…무엇이라 적혀 있느냐."
"이레 뒤래요." 목이 잠겼다. "그리고… 제 이름이, 먼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레. 그 안에 그 밤을 본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먼저 묶이는 건 나다. 그런데 내 옆의 사슬 소리는 여전히, 내 걸음에 맞춰 느렸다.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