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자님
내일도 먹겠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한 줄이 더 걸렸다.
아침상을 물리고 방에 들어와 계약서를 다시 폈다. 뒷장 특약 칸 맨 아래에 볼펜으로 쓴 줄이 하나 있었다. '본 주택은 임대인과', 그다음 두 글자가 잉크에 번져 있었고, 끝의 '사용함'만 또렷했다.
어젯밤 문 너머의 노래도, 오늘 아침 찬장 아래로 스친 붉은 것도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도 종이에 적힌 건 달랐다. 내가 무슨 계약에 이름을 적었는지는 알아야 했다. 이 집에서 내일도 밥을 얻어먹으려면.
신발을 꿰는데 등 뒤에서 느린 목소리가 났다.
"부동산, 가요?"
하루 씨가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앞치마도 풀지 않은 채였다. 눈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종이에 가 있었다.
"아, 네. 확인할 게 좀..."
"물리러요?"
그 말이 하루 씨 입에서 먼저 나올 줄은 몰랐다. 목소리는 아까 국을 뜰 때와 똑같이 느렸다. 그래서 더 귀에 박혔다.
"아니요. 아니 그게, 물리는 게 아니라... 여기 한 줄이 번져서요. 뭐라고 쓰여 있는지 몰라서."
하루 씨는 종이를 한 번 더 봤다. 그러고는 그 얘기는 두고 다른 걸 물었다.
"점심은 몇 사람 몫으로 지을까요."
"두 사람이요. 금방 와요."
"그래요."
하루 씨가 골목 쪽으로 턱을 조금 들었다.
"길이 미끄러울 거예요. 감이 떨어져서."
정말이었다. 골목 돌바닥 여기저기 감이 터져 있었고, 밟을 때마다 밑창이 달게 쩍쩍 붙었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돌아보니 하루 씨는 아직 대문 안에 서 있었다.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부동산은 큰길로 나가는 모퉁이에 있었다. 유리문에 '행복공인중개사'라는 시트지 글씨가 붙어 있었고, 그 밑으로 지워지다 만 옛 페인트 글씨가 비쳤다. 복덕방. 문을 열자 믹스커피 냄새와 석유난로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이고, 계약자님! 벌써 오셨네. 커피 한 잔 하시죠?"
나는 대답 대신 계약서 뒷장을 책상에 펴고 번진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요. 임대인과, 뭐예요? 여기 두 글자."
사장님이 안경을 이마로 밀어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아, 그거요. 형식적인 거예요, 형식적인 거."
"빈집이라고 하셨잖아요. 집주인이 같이 산다는 거, 알고 계셨죠?"
"알았다기보다는... 잠깐만요, 원본 좀 보고요."
사장님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클립으로 묶은 계약서 사본이 한 뭉치 들어 있었다. 맨 위 장 주소 칸에 낯익은 번지가 적혀 있었다. 골목 끝 한옥, 우리 집이었다. 장마다 노란 메모지가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아래 장으로 갈수록 메모지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맨 밑의 것은 거의 갈색이었다.
나보다 먼저 그 대문을 밀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간 사람들이었다.
사장님은 맨 위 한 장만 빼 들고 서랍을 밀어 닫았다. 내 이름이 적힌 장이었다.
"싼 데는 싼 값의 사정이 있는 거죠. 계약자님, 커피 식어요."
"...물리면, 얼마예요?"
"특약대로 석 달 치, 사십오만 원이요."
이번엔 한 숨에 나왔다. 통장에는 이십만 원 남짓이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들려요?"
수화기 너머가 너무 조용해서 밥솥 김 빠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칙, 칙.
"하루 씨?"
"네. 하루예요. 종이에 적힌 번호로 걸었어요. 이게 맞게 걸린 거죠?"
"맞게 걸렸어요."
"다행이에요. 처음 걸어 봐서요."
숨 한 번만큼 있다가 한마디가 더 붙었다.
"이걸로는."
하루 씨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휴대폰 밖으로 조금 샜다. 맞은편에서 사장님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졌다. 허리가 펴지고, 고개가 반 뼘쯤 숙여졌다. 내 휴대폰 쪽이었다. 쉰 넘은 남자가 남의 전화기에 대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본인도 그걸 알았는지 얼른 커피를 집어 들었다.
"점심 말인데요. 장떡을 또 부칠까 해요. 어제 당신이 맛있다고 해서."
"아, 좋죠."
"그럼 많이 부쳐 둘게요."
수화기 너머가 조금 조용했다.
"늦어지면, 남는 건 제가 먹으면 되니까요."
솥째 식어 갈 장떡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바닥, 아직 따뜻해요."
"아, 보일러요?"
"당신이 켜 둔 거, 안 껐어요. 끄는 걸 몰라서."
웃음이 새려고 해서 나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끄는 건 빨간 거 한 번 더 누르시면 돼요."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밥솥이 칙, 하고 한 번 울었다.
"...안 끌게요."
그 말은 아주 늦게 왔다.
"그럼, 끊을게요."
그러고는 아무 소리가 없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하루 씨?"
"이건, 어떻게 끊어요?"
"접으시면 돼요."
"접어요?"
탁. 폴더 닫히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는 결국 짧게 웃어 버렸다. 폴더폰이었다. 아직 그걸 쓰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드니 사장님이 커피를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집주인분이시죠? 목소리가 참 차분하시네."
"사장님, 그분 아세요?"
"제가요?"
웃음이 뒤늦게 따라붙었다.
"아이, 계약 때 한 번 뵀나. 그렇죠, 한 번."
서류로 한 번 본 사람한테 허리를 펴는 사람은 없다. 사장님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화제를 바꿀 때 나오는 손이었다.
"계약자님, 딱 한 달만 살아 보세요. 그래도 영 아니다 싶으면 제가 다음 세입자 구해 드릴게요. 다음 사람 들어오면 위약금 없는 거거든요."
사십오만 원. 아니면 한 달. 계산할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탁, 폴더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 끌게요.
"...한 달이요. 딱 한 달."
"아이고, 잘 생각하셨어요! 다행이다, 이번엔..."
말이 거기서 끊겼다.
"이번엔요?"
"아, 이번 달엔 계약이 영 없어서요. 하하."
사장님이 책상 위 메모지 묶음에서 한 장을 뜯어 '다음 달 이맘때'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그리고 내 계약서에 붙였다. 번진 줄 바로 위였다. 서랍 속 메모지들과 같은 노란색이었다.
돌아오는 골목에서는 감을 밟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걸었다. 대문 앞까지 오니 들기름에 장떡 지지는 냄새가 먼저 마중 나와 있었다.
하루 씨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폴더폰을 두 손으로 쥐고, 다시 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어요?"
어젯밤에 들은 말과 똑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뒤에 한마디가 더 붙었다.
"점심 전에 왔네요."
"금방 온다고 했잖아요."
하루 씨가 부엌 쪽을 한 번 봤다.
"그럼, 안 남겠네요."
폰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부동산은 뭐래요?"
나는 마루에 올라 낮은 상 건너에 앉았다.
"한 달이요. 한 달만 살아 볼게요."
하루 씨는 대답 대신 마당 감나무를 봤다. 가지 끝에 주황색 감이 아직 꽤 매달려 있었다.
"한 달이면 저게 다 떨어져요. 꼭대기 것까지."
"감으로 세세요? 날짜를?"
"달력은 자꾸 넘기는 걸 잊어서요."
하루 씨 얼굴은 하나도 농담이 아니었다.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그 눈이 꼭대기 가지에 가 있어서 웃지 못했다. 거기 감 하나가 유난히 빨갰다. 저건 좀 늦게 떨어졌으면 했다.
"그동안 불편한 건 말해요. 고칠 수 있는 건 고칠게요."
"저 방 빼고요."
내가 먼저 말했다. 하루 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어제는 그 말을 하루 씨가 했다.
"네. 저 방 빼고."
이번엔 부드러웠다.
하루 씨 눈이 상 위 계약서로 내려갔다. 노란 메모지 밑으로 번진 그 줄이 보였다.
"그거, 못 읽었죠."
"네. 사장님은 형식적인 거래요."
하루 씨 손가락이 종이 위로 왔다. 번진 자리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닿지는 않았다.
"같이요."
"네?"
"임대인과 같이 사용함. 거기 그렇게 써 달라고 했어요. 제가."
계약서에 들어갈 말 같지 않은 낱말이었다. 공동도 아니고 동거도 아니고, 같이.
"...진짜? 아니, 그럼 사장님이 일부러 번지게..."
반말이 튀었다. 하루 씨는 손가락을 거두지 않았다. 번진 자리 앞에 그대로 둔 채 말했다.
"번진 건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고는 나를 봤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근데, 고쳐 달라고도 안 했어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하루 씨가 일어났다. 국이 넘친 것도, 전화가 온 것도 아니었다. 할 말을 다 한 사람처럼 앞치마를 한 번 털고 부엌으로 갔다. 나는 그 손가락이 머물렀던 자리를 한참 내려다봤다. 종이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다.
점심상이 들어왔다. 장떡이 한 접시 가득이었다. 하루 씨가 밥을 푸러 다시 부엌에 들어간 사이, 나는 문턱에서 압력밥솥 뚜껑을 봤다. 뚜껑 위에 종이쪽지가 하나 얹혀 있었다. 삐뚤빼뚤한 연필 글씨였다. 점심, 저녁, 내일 아침.
"이거 오늘 한 번에 다 지은 거예요?"
"네. 아침에요."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이걸 하루 씨 혼자 드시려고 했어요?"
하루 씨는 쪽지를 손끝으로 바로 놓았다.
"당신이 안 오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쪽지 글씨가 더 삐뚤어 보였다. 나는 두 그릇을 먹었다. 하루 씨는 내 그릇이 비는 걸 보고서야 자기 숟가락을 들었다.
상을 물리고 나서 하루 씨가 폴더폰을 내 쪽으로 밀었다.
"이거, 당신 번호 넣어 줄래요?"
"아까 거셨잖아요."
"종이 보고 하나씩 눌렀어요. 열한 개."
나는 웃으며 폰을 집었다. 따뜻했다. 하루 씨 손에 오래 쥐여 있던 온기였다. 그 온기가 내 손바닥으로 옮겨 오는 동안, 나는 화면을 보는 척 한참 가만히 있었다.
연락처는 두 개였다. 떡집. 부동산.
"이게 다예요?"
"더 넣을 사람이 없었어요."
사실만 내려놓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사실을 어디에 놔야 할지 몰라서 자판만 눌렀다. 낡은 숫자 자판이라 손가락이 자꾸 엇나갔다.
"도하, 라고 넣을게요."
하루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다 넣고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폰이 건너가는 사이 하루 씨 손끝이 내 손가락 마디를 스쳤다.
아침 부뚜막 앞에서 잡았던 손목처럼 서늘할 줄 알았다. 서늘하지 않았다. 폰에 남아 있던 그 온기가 손끝에도 그대로 있었다.
하루 씨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반 걸음 물러서지도 않았다. 폰을 받친 채로, 부엌에서 밥솥이 칙 하고 한 번 울 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폰을 제 쪽으로 가져갔다.
하루 씨는 화면을 오래 봤다. 내 이름을 소리 내 읽지는 않았다.
"세 개가 됐네요."
그러고는 폴더를 접었다. 탁. 아까보다 조금 자신 있는 소리였다.
"이제 끊는 것도 알아요."
"부동산 사장님 번호도 있던데요. 그분, 하루 씨를 아는 눈치던데."
하루 씨가 엄지로 폴더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그 사람은 다 아는 척을 잘해요."
서랍 속 바랜 메모지가 다시 떠올랐다. 그 얘기를 꺼내려고 입을 여는데, 하루 씨가 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며 먼저 한마디를 보탰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오래, 이 집 대문을 봐 줬어요."
오래가 얼마나 오래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오후에 하루 씨는 장바구니도 없이 혼자 골목으로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손에 까만 비닐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걸을 때마다 안에서 병 부딪는 소리가 났고, 봉지 입구로 초록색 병목 하나가 비죽 나와 있었다. 소주병이었다.
봉지는 부엌 냉장고 맨 아래 칸으로 들어갔다.
"하루 씨, 그거..."
"제 거예요. 저녁에."
냉장고 문이 닫혔다. 하루 씨가 문에 손을 댄 채로 한마디를 더 했다.
"당신 건 밥이에요."
저녁이 되자 부엌에서 바가지가 쌀통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드득, 드득. 조금 뒤 하루 씨가 뚝배기를 데우며 나를 불렀다.
"밥 좀 퍼 줄래요? 양푼에."
압력밥솥 뚜껑에는 아직 그 쪽지가 얹혀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올라왔다. 점심에 내가 두 그릇을 먹었고 하루 씨도 몇 숟갈은 떴다. 그런데 퍼낸 자리가 없었다. 밥은 아침에 처음 지은 것처럼 둥글게 솟아 있었다. 나는 주걱을 깊이 찔러 넣었다. 한 주걱, 두 주걱, 세 주걱. 양푼이 거의 찼는데 주걱 끝에 솥 바닥이 닿지 않았다. 솥 안을 들여다봤다. 하얀 밥만 보였다.
"뜨거워요?"
어느새 하루 씨가 옆에 와 있었다. 어제 리모컨 앞에서 반 걸음 물러났던 사람이, 오늘은 내 팔꿈치 바로 옆에서 같이 솥을 들여다봤다. 둘 사이에 리모컨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하루 씨, 이거 아까 제가 두 그릇이나..."
"많이 지었다고 했잖아요."
하루 씨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어제 장떡 앞에서 본 딱 그만큼이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서 뚜껑을 받아 솥을 닫았다. 딸깍.
그 소리를 듣는데 엉뚱한 게 떠올랐다. 지난 몇 달, 내 몫으로 남겨진 밥은 없었다. 편의점 즉석밥 비닐을 혼자 뜯었고, 다 먹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밥이란 먹으면 비는 거였다.
마루 낮은 상에 다시 마주 앉았다. 하루 씨가 양푼 옆에서 주걱을 들고 내 빈 그릇을 봤다.
"더 드세요."
"하루 씨는요?"
"저는 아까 먹었어요."
"아까 언제요?"
"아까요."
냉장고 맨 아래 칸의 초록 병목이 생각났다. 당신 건 밥이에요. 그럼 하루 씨 건 뭐냐고 물으려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행복공인중개사'가 떠 있었다.
"계약자님, 저녁 시간에 죄송해요. 아까 깜빡한 게 있어서요."
목소리가 낮에 듣던 것과 달랐다.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났다.
"네, 말씀하세요."
"...아니, 별건 아니고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그 사람이 말을 고르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근데 계약자님, 그 집에서... 밥은 드셨어요?"
낮에 하루 씨 목소리가 그랬듯, 그 목소리도 휴대폰 밖으로 샜다. 부엌에서 보글거리던 뚝배기 소리가 뚝 멎었다.
상 건너에서 하루 씨가 내 밥그릇 위에 주걱을 든 채 멈춰 있었다. 주걱 끝에서 밥알 하나가 상 위로 떨어졌다. 하루 씨는 그걸 줍지 않았다. 주걱을 쥐지 않은 손이 상을 건너와 내 밥그릇 가장자리를 붙잡았다. 누가 그 그릇을 치우려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서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내가 수화기에 대고 입을 열기 전에, 하루 씨가 아주 낮게 말했다.
"...한 그릇, 더 줄까요."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