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네 떡
"네. 먹었어요."
수화기에 대고 한 대답이었는데, 내 눈은 상 건너편에 가 있었다. 하루 씨가 주걱을 든 채 멈춰 있었다. 내 밥그릇 가장자리를 붙잡았던 손은 어느새 상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두 그릇이요. 점심에도 두 그릇 먹었고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사장님 쪽 텔레비전 소리만 작게 들렸다. 돈 얘기를 할 때는 한 번도 쉬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내가 밥을 먹었다는 말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럼 됐어요."
사장님이 한 번 더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 같지 않았다.
"그럼, 됐네."
전화가 끊겼다. 부엌에서 멎었던 뚝배기가 다시 보글거리기 시작했다. 하루 씨의 주걱이 양푼으로 갔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빈 그릇에 밥이 한 주걱 더 올라왔다.
"사장님은 왜 그런 걸 물어요? 이 집에서 밥 먹었냐고."
하루 씨가 주걱을 양푼 가장자리에 걸쳐 놓았다. 대답은 한참 뒤에 왔다.
"입에 맞았는지, 묻는 거예요."
"맞았죠. 장떡도 국도."
"...안 맞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하루 씨는 그 말을 하고 자기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한 숟갈 떠서는 입에 넣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장님 서랍 속 메모지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 생각을 무국 한 숟갈과 같이 넘겼다. 맑게 끓인 국 위에 들기름이 한 방울 떠 있었다.
"하루 씨, 내일 장 보러 가세요?"
하루 씨 숟가락이 멎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쌀통이요. 아까 바닥 긁는 소리가 나던데요."
하루 씨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들킨 얼굴이었다. 너무 차분해서 하마터면 들킨 줄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다.
"쌀이, 떨어져 가요. 아침 일찍 가려고 했어요. 떡집이 첫 시루를 아침에 내니까요."
"근데 밥솥은 안 비던데요. 아까 세 주걱을 펐는데."
이번 대답은 더 늦었다. 뚝배기가 두 번 보글거릴 만큼.
"...밥솥은, 제가 하는 거라서요."
하루 씨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쌀통은, 사 와야 해요. 누가 같이 먹으면."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뒤의 반쪽은 알아들었다. 누가 같이 먹으면. 그 누가 나였다.
"그럼 장 보는 건 제가 낼게요."
"월세에 들었어요. 밥값까지."
"한 달 십오만 원에요? 아니 잠깐만요, 그건 말이 안..."
"말이 안 돼도, 들었어요."
이 사람이랑 말싸움해서 이길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같이 가요. 짐이라도 들게요."
국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 주던 하루 씨 손이 멎었다.
"...같이요?"
"쌀 사신다면서요. 무겁잖아요."
대답은 내가 국 한 숟갈을 다 삼킬 만큼 늦게 왔다.
"...그래요. 대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하루 씨는 양푼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밥솥 뚜껑 닫히는 소리가 났다. 딸깍. 어제보다 조금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그날 밤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마루 쪽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났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는 한참 이어지다가 한참 뒤에야 조용해졌다.
다음 날 아침, 하루 씨는 나보다 먼저 대문 앞에 나와 있었다. 긴 회색 카디건을 입고 팔에는 천 장바구니를 걸었다. 손에는 흰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골목 끝에서 비스듬히 들어온 해가 그 머리칼에 걸렸다. 등불 아래서는 달빛 같던 머리칼인데, 아침 해 아래서는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신발 끈을 두 번이나 잘못 묶었다.
"제가 늦었어요?"
"아니요. 제가, 일찍 나왔어요."
하루 씨가 흰 봉투를 내밀었다.
"장 볼 돈이에요. 당신이 들고 있어요. 저는 잘 흘려요."
봉투가 두툼했다. 나는 그걸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통장에 남은 돈은 얼마 안 됐다. 그래도 신세는 빨리 갚아야 나갈 때 가볍다. 봉투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자 시장 소리가 먼저 왔다. 뻥튀기 기계가 뻥 하고 터졌고, 생선전 얼음 위로 고등어가 탁탁 내려앉았다.
"하루 씨, 오늘은 둘이네?"
생선전 아저씨가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하루 씨가 고개를 숙였다.
"...네. 둘이에요."
그 말을 천천히 했다. 맞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두부집에서 두부 두 모를 샀다. 나는 카드를 단말기에 댔다. 삑.
하루 씨가 그 소리에 내 손을 봤다. 단말기를 봤다가 다시 내 손을 봤다.
"...그게, 다예요?"
"네. 다예요."
"돈이, 안 건너갔는데요."
"건너갔어요. 안 보이게요."
하루 씨는 내 카드를 한참 내려다봤다. 오래된 부적이라도 들여다보는 얼굴이었다.
"편하네요."
조금 있다가 한마디가 더 붙었다.
"...좀, 쓸쓸하고."
"쓸쓸해요?"
"돈을 건넬 때, 손이 닿잖아요. 원래는. 그래서 얼굴을 외워요. 이 집 두부는 저 손에서 받는다, 하고요."
두부집 아주머니가 그 말에 웃었다. 하루 씨는 웃지 않았다. 정말로 아주머니 손을 외우는 눈이었다.
쌀집에서는 십 킬로 한 포대를 샀다. 이번에도 삑. 하루 씨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고 나서 나를 봤다.
"봉투는, 왜 안 써요?"
"아, 그게... 카드가 편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 말한 것도 아니었다.
쌀 포대를 어깨에 메자 무릎이 한 번 휘청했다. 하루 씨가 내 어깨의 포대를 봤다. 셈하는 눈이었다.
"...두 달은 가요. 당신이 두 그릇씩 먹어도."
그 눈가에 뭔가가 스쳤다. 웃음이 될 뻔하다가 만 것이었다.
두 달. 나는 한 달만 살기로 한 사람이었고, 하루 씨도 그걸 알았다. 포대를 고쳐 메는데 하루 씨가 먼저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 왔어요?"
이 집에 온 뒤로 하루 씨가 나에 대해 뭘 물은 건 처음이었다. 쌀 포대가 갑자기 더 무거워졌다.
"싸서요."
하루 씨는 걸음을 늦추고 기다렸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사실만 말해 두고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사실을 꺼내게 됐다.
"...몇 달 동안 밥을 혼자 먹었어요. 편의점에서요. 어디로 가든 혼자 먹을 거면, 제일 싼 데가 낫겠다 싶었어요."
하루 씨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선전 얼음 녹는 물이 우리 발치로 가늘게 흘러왔다. 하루 씨가 그걸 비켜 디디며 말했다.
"...그럼, 잘못 왔네요."
"네?"
"여기선, 혼자 못 먹어요."
그 말을 하고 하루 씨는 앞서 걸었다. 나는 포대를 멘 채로 반 박자 늦게 따라갔다. 귀가 뜨거웠다. 쌀이 무거워서라고 하기로 했다.
떡집 맞은편, 두부집 차양 밑에서 하루 씨가 멈췄다. 길 건너 떡집 시루에서 시장에서 제일 큰 김이 오르고 있었다.
"떡은, 당신이 사 와요."
"같이 안 가요?"
"...저는 여기 있을게요."
떡집에서 오른 김이 길을 건너 이쪽으로 번져 왔다. 하루 씨가 카디건 소매를 끌어내려 손등을 덮었다. 그러고는 차양 그늘 안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아침 공기가 찬 것도 아니었다.
"쑥 절편, 다섯 장이요. 그렇게만 말하면 알아요. ...다녀와요."
떡집 앞은 따뜻했다. 쌀가루 찌는 냄새, 쑥 냄새, 팥 삶는 단내가 한꺼번에 얼굴로 훅 끼쳤다. 간판은 너무 낡아서 글씨가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김 너머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떡판 앞에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저, 쑥 절편 다섯 장..."
"도하야."
말하던 중에 나는 멈췄다. 할머니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어젯밤 늦게 그 집 사람이 전화를 다 했지 뭔가. 내가 그 번호를 적어 준 지가 언젠데, 걸려 온 건 처음일세."
칼이 탁, 탁, 떡판을 쳤다.
"새 사람이 왔다고. 이름은 도하라고. 밥을 잘 먹는다고. 그 말만 하고 끊더구먼. 끊는 데도 한참 걸리데."
어젯밤 마루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하루 씨'가 떠 있었다. 어제 저장해 둔 번호였다. 뒤를 돌아보니 길 건너 차양 밑에서 하루 씨가 폴더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여보세요."
"다섯 장, 말했어요?"
"하루 씨, 저 보이시잖아요."
"...보여요. 그래도요."
"말했어요. 다섯 장."
"그럼, 됐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금 조용했다. 시장 소리가 두 번 들렸다. 한 번은 전화기 속에서, 한 번은 길 건너에서.
"...끊을게요."
길 건너에서 하루 씨가 폴더를 접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끊느냐고 묻지 않았다. 폰을 두 손으로 쥔 채 생선전 얼음만 보고 있었다. 이쪽은 안 보는 척이었다.
할머니의 칼이 처음으로 멎었다.
"허. 어제 처음 걸더니, 오늘은 길 건너서도 거는구먼."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김 너머로 나를 지나 두부집 차양 쪽을 봤다. 하루 씨가 그 눈길을 받고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할머니도 딱 그만큼 숙였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은 먹던가?"
"네?"
"그 집 사람 말일세. 자네 말고, 그 사람."
"...잘 안 드세요. 몇 숟갈이요. 제 그릇만 채우시고."
칼을 쥔 손이 떡판 위에서 한참 내려오지 않았다.
"...늘 저기 서서 기다리지. 이 앞까지는 안 와."
"왜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칼을 다시 들었다. 칼은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떡판을 쳤다.
"따끈할 때 먹어야지."
할머니는 갓 썬 팥시루떡 한 덩이를 기름종이에 싸서 내 손에 쥐여 줬다. 뜨거웠다. 팥고물이 손바닥에 묻었다.
"이건 자네 걸세. 돈은 안 받네."
그러고는 쑥 절편 다섯 장을 흰 종이봉투에 담았다. 봉투 한가운데에 빨간 도장 글씨가 바래 있었다. 순례네.
"순례네... 할머니 성함이세요?"
할머니는 봉투 입구를 두 번 접었다.
"우리 어머니 적부터, 그 사람 건 늘 이걸세."
나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를 봤다. 그리고 길 건너, 달빛 같은 머리칼을 한 사람을 봤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서른은 안 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단말기는 계산대 끝에 있었다. 나는 카드 대신 지갑 안쪽에 접어 둔 만 원짜리를 꺼냈다. 비상금으로 넣어 둔 마지막 현금이었다. 왜 현금을 꺼냈는지는 나도 몰랐다.
할머니가 내 손에 들린 돈을 보더니 길 건너를 한 번 더 봤다.
"그 집 돈이 아니구먼."
"제 돈이에요."
"...그래."
할머니가 돈을 받았다. 받는 손이 내 손에 닿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돈을 건넬 때 손이 닿는 것. 하루 씨가 말한 게 이거였다.
봉투를 건네면서도 할머니는 바로 손을 놓지 않았다.
"도하야."
"네."
"그 집 사람한테, 부디 잘해주게나."
그 한마디만 아주 느렸다.
"...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돌아오는 길에 하루 씨는 떡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봉투가 따뜻한지 손바닥을 봉투에 붙이고 걸었다. 아까 김 앞에서 소매 속에 감추던 그 손이었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어요?"
"하루 씨가 어젯밤에 전화하셨다고요. 제 이름도 말하셨다고."
하루 씨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감이 터진 돌바닥을 비켜 디뎠다. 한참 뒤에야 말이 왔다.
"번호가, 세 개가 됐으니까요. 누구 한 사람한테는, 말해 두고 싶었어요. 당신이 왔다고."
"그걸 왜 저한테 숨기셨어요?"
"...숨긴 게 아니에요. 당신이 자고 있었어요."
마루에서 들리던 목소리 아래, 나는 분명히 깨어 있었다. 하루 씨도 그걸 아는 것 같았다. 봉투에 붙인 손바닥이 조금 더 납작해졌다.
"또 뭐라고 했어요?"
"부디 잘해주래요. 하루 씨한테."
하루 씨가 멈춰 섰다. 감나무 가지가 담장 너머로 늘어진 자리였다.
"...당신은, 뭐라고 했어요?"
"네, 라고요."
하루 씨는 나를 보지 않고 손에 든 봉투만 봤다.
"그분 말은, 들어 두면 좋아요."
"왜요?"
"대개는, 맞아요."
하루 씨가 다시 걸었다. 반 걸음 앞이었는데, 아까보다 걸음이 느렸다. 쌀 포대를 멘 내가 따라올 수 있을 만큼만.
대문 앞에서 나는 안주머니의 흰 봉투를 꺼냈다.
"이거요. 하나도 안 썼어요."
하루 씨는 봉투를 내려다보기만 하고 받지 않았다.
"...두부도, 쌀도, 떡도요?"
"네. 다 제 돈으로 샀어요."
"왜요?"
"밥값이요. 어제오늘 얻어먹은 거요. 한 달 치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하루 씨가 두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다. 이번에는 손끝이 내 손등에 닿았다.
뜨거웠다. 방금 시루에서 꺼낸 떡처럼. 사람 손이라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첫 아침 부뚜막 앞에서 잡은 손목은 서늘했다. 어제 폰을 건네받던 손끝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맨손에 솥뚜껑을 들었다. 이 사람 손은 닿을 때마다 온도가 달랐다.
하루 씨가 먼저 놀랐다. 눈이 내 손등에 가 있었다. 손을 거두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봉투를 쥔 손이 카디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손이, 뜨거우시네요."
"떡을, 들고 와서요."
떡 봉투는 아까부터 장바구니 안에 있었다. 하루 씨도 그걸 봤다. 그래도 고쳐 말하지 않았다. 나도 장바구니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루 씨가 나를 오래 봤다. 그 눈이 내 어깨의 쌀 포대에 머물렀다가 내 얼굴로 왔다.
"갚는 사람이네요, 당신."
"네?"
"빚을, 빨리 갚는 사람. 그런 사람은..."
하루 씨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열었다.
"...나갈 때, 가벼워요."
숨이 걸렸다. 오늘 아침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내가 속으로 한 말이었다. 소리 내 말한 적은 없었다.
"들어와요. 쌀, 무겁죠."
부엌에서 장 본 것을 풀었다. 하루 씨는 두부를 찬물에 담그더니, 내가 내려놓은 쌀 포대 귀퉁이를 한 손으로 쥐었다. 그대로 들어 올렸다. 십 킬로가 장바구니처럼 기울었고, 쌀이 쌀통으로 쏟아졌다. 하루 씨는 그 소리를 끝까지 서서 들었다. 숨 한 번 고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어깨를 문질렀다.
"...무거운 거 제가 들려고 따라간 거, 맞죠?"
하루 씨가 빈 포대를 반으로 접었다.
"들어 줬잖아요. 대문까지."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
"그게, 무거운 거예요."
떡 봉투는 맨 마지막에 열었다. 쑥 절편 다섯 장을 꺼내 하나씩 들여다봤다. 금 간 데는 없는지, 모양은 어떤지. 두 장은 작은 접시에 올리고 세 장은 면보에 싸서 찬장 안쪽 깊숙이 넣었다.
"그건 왜 넣어요?"
"아껴 먹는 거예요."
"떡을요? 다 드세요. 또 사 오면 되죠."
"...이건, 아껴 먹는 거예요."
같은 말을 두 번 했다. 두 번째는 조금 단단했다.
하루 씨는 빈 봉투를 펴서 손바닥으로 반듯하게 다렸다. 엄지가 빨간 글씨 위를 한 번 쓸었다.
"순례가 누구예요? 할머니는 대답을 안 하시던데."
"...예쁜 이름이죠."
그게 대답의 전부였다. 하루 씨는 봉투를 두 번 접어서 찬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접힌 종이봉투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전부 같은 자리에 빨간 글씨가 찍혀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종이가 누레졌고, 맨 아래 것은 종이부터 달랐다. 거친 갱지였다. 빨간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거 다 그 떡집 거예요?"
"...버리기가, 아까워서요."
하루 씨가 서랍을 닫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오후 볕이 마루 끝까지 들어왔다. 하루 씨가 낮은 상에 접시를 놓았다. 쑥 절편 두 장 옆에 할머니가 나한테 준 시루떡도 놓였다.
"당신 것도, 같이 놔요."
나는 시루떡을 반으로 갈랐다. 아직 김이 조금 났다.
"반 드실래요?"
"...그건 당신 거예요. 할머니가 당신 주신 거."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거죠."
하루 씨가 내 손에 들린 반쪽을 봤다. 한 박자 쉬더니, 받는 대신 손끝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짚었다. 거기 놓아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거기 놓았다.
"할머니는 늘, 따끈할 때 먹으라고 해요. 근데 저는, 식은 게 좋아요."
"왜요?"
"식으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하루 씨가 쑥 절편을 한 장 집어 새끼손톱만큼 뜯었다.
이 집에 온 지 사흘째였는데, 하루 씨가 뭘 제대로 먹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씹는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천천히 먹었고, 다 삼키고 나서야 다음 조각을 뜯었다. 나는 내 시루떡도 잊고 그걸 지켜봤다.
"맛있어요?"
하루 씨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똑같아요."
"뭐가요?"
"맛이요. 옛날엔..."
말이 멎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 씨가 그 말을 삼키지 않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아주 작게 이었다.
"...옛날이랑, 똑같아요. 이 떡은."
"옛날이 언제예요?"
내 입에서 먼저 나간 말이었다. 하루 씨가 떡을 든 채 나를 봤다.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이 집에서 '옛날' 뒤에는 늘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하루 씨가 떡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펴서 상 모서리 높이에 댔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는 높이였다.
"순례가, 이만 했을 때요."
우리 어머니 적부터. 떡집 할머니의 하얀 머리가 떠올랐다. 그 할머니의 어머니가 상 높이만 하던 때를, 이 사람은 봤다. 그때도 이 떡을 먹었다.
하루 씨는 손을 거두고 떡을 다시 집었다. 말을 너무 많이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만큼은 말해 두기로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루 씨."
"네."
"그거 다 드시면요. 찬장에 넣어 둔 것까지 다요."
"..."
"제가 또 사 올게요. 제 돈으로요. 하루 씨 건 늘 쑥 절편 다섯 장이라면서요."
떡을 뜯던 하루 씨의 손이 멈췄다.
"...한 달 동안요?"
"한 달 동안요."
하루 씨가 마당 감나무를 봤다. 꼭대기의 그 빨간 감이 아직 매달려 있었다.
"그럼... 아껴 먹을 필요가, 없겠네요."
하루 씨가 남은 쑥 절편을 이번에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옅은 웃음이었다. 입꼬리보다 눈가가 먼저 풀렸다. 너무 차분해서 낯설던 눈이 그 순간만은 낯설지 않았다.
볕이 하루 씨 그림자를 마루 위에 길게 눕혀 놓고 있었다. 웃음이 번지는 그 순간, 그림자 끝이 한 번 살랑 흔들렸다. 하루 씨는 떡을 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그림자는 하루 씨 등보다 조금 더 길었다.
이번에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림자 끝이 한 번 더 흔들렸다. 하루 씨가 내 눈이 간 곳을 따라 마루를 내려다봤다. 감추지도,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떡을 다 삼키고 나서 말했다.
"...볕이, 좋네요."
그게 다였다. 웃음은 소리도 없이 왔다가, 그 말과 함께 사라졌다.
부엌에서 밥솥이 칙 하고 김을 뺐다.
하루 씨가 쑥 절편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내가 가장자리에 놓아 둔 시루떡 반쪽을 집었다. 이미 식어 있었다.
"...내일은, 따끈할 때 먹어 볼게요."
나는 접시를 받으면서, 떡집 첫 시루가 몇 시에 나오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이삿짐 상자 사이에 누워 있는데 복도 건너 그 방 문 너머로 노래가 흘렀다. 첫날 밤에 듣던, 라디오에서도 안 나오는 옛 노래였다.
이번에는 노래 밑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낮은 여자 목소리가 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하루 씨였다.
흥얼거림이 한 소절에서 멎었다. 노래만 혼자 몇 마디를 더 갔다. 그러다 하루 씨가 그 방 안의 누군가에게 말하듯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듣는 말끝이었다.
"...오늘은, 둘이서 갔더랬어요. 떡집에."
노래가 한 마디 지나갔다.
"이번 사람은, 갚는 사람이에요. 당신처럼."
노래가 다시 이어졌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손등을 쥐었다. 낮에 그 손끝이 닿았던 자리였다.
그 방에는 하루 씨 혼자뿐이어야 했다.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