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누이
"누구냐, 무녀."
실이 손목을 한 번 더 앞으로 끌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대답을 재촉하는 당김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쇠못 꾸러미가 한 걸음마다 짤그랑 울렸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히스이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졌다.
"대답이 늦구나. 감싸 줄 셈이면, 감싸 보든가."
무릎 밑의 기도는 그쳐 있었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마루 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나는 무릎을 떼고, 혀 밑에 붙어 있던 이름을 떼어 냈다.
"…시라누이, 입니다."
방울이 울리지 않았다.
실은 팽팽한 채로 멈춰 있었다. 당겨지지도, 늦춰지지도 않았다. 꼬리가 마루를 쓰는 소리도 그쳤다. 이번에는 내가 그 침묵을 셌다. 지난밤 그녀가 내 침묵을 세던 것처럼. 셋까지 셌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라누이."
히스이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천천히 씹었다. 삼키지는 않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조금 전에 아는 냄새라고 한 신이었다. 나는 히스이를 올려다보았다.
"냄새는 안다. 쇠 벼리는 손, 먹 가는 손. 얼굴도 안다. 못 쥔 얼굴, 부적 쓰던 얼굴, 돌아서던 등까지 다. 하나도 안 잊었다."
꼬리 끝이 마루를 한 번 쓸었다.
"그런데 그 손들이 서로를 뭐라 불렀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천 년을 갇혀 있으면서, 나를 가둔 집 이름 하나를 몰랐어."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웃음이 되기 전에 도로 내려왔다.
"그걸 이제야 네 입으로 듣는구나. 그 집이 너를 묶었느냐."
"…무녀를 산에 올리자는 말을 처음 낸 것은, 그 댁이었습니다."
말하는 동안 왼손이 저절로 오른 손목을 덮었다. 실 아래, 짚 밧줄이 파고들었던 자리였다.
짤그랑.
남은 것은 마흔 단. 스무 해 동안 쓸어 온 계단이라 소리만으로 알았다.
"그래서 댔느냐. 원망해서."
"…물으셨으니까요."
"물었으니까."
히스이가 내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환한 눈이 방금 대답이 나온 내 입에 머물렀다.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무슨 셈을 했느냐."
"…셈은, 안 했습니다."
"했다. 혀 밑에 한참 물고 있었다. 뱉기 전에 한 번 도로 삼키려다 말았고. 나는 그 사이를 셌다."
꼬리 끝이 마루를 탁 쳤다.
"그 이름을 대면 내가 저 냄새를 거슬러 산을 내려갈 줄, 너는 알았다."
"…예."
"안 대면 저 못이 이 문 앞까지 올라올 줄도 알았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 셈은 그녀가 묻기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끝난 셈을 소리 내어 말할 줄을 나는 몰랐다. 소리를 내면 그것이 무엇이 되는지도 몰랐다.
히스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실을 감은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선 내놓은 만큼만 받는다고 했지."
목소리가 반 톤 내려갔다.
"천 년이다. 너희는 내게서 가져가기만 했다. 문을 가져가고, 숨을 가져가고, 내 이름 부르는 소리를 가져갔지. 그 이름 하나 내 손에 쥐여 준 놈은 없었다."
실을 감던 손가락이 멈췄다.
"네가 그 이름을 내놓았구나. 나한테."
실이 한 번, 아주 짧게 멈칫했다. 당긴 것도 늦춘 것도 아니었다. 쥐고 있던 손이 제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 잠깐 잊은 것 같은 떨림이었다. 방울은 울리지 않았다. 나는 숨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짤그랑.
히스이가 먼저 눈을 돌렸다. 산 아래였다.
"그 집은 지금 무얼 하지."
"…산 아래에서 제일 큰 대문을 가졌습니다."
"그 대문 앞에서, 너도 고개를 숙였느냐."
"…예. 지날 때마다."
히스이가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손은 실 위에만 있었다.
"그 고개, 어젯밤 내가 한 번 들어 주었다."
한 박자 쉬었다.
"두 번은 안 든다."
나는 목을 세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짤그랑.
"스물."
히스이가 먼저 말했다. 그녀도 세고 있었다.
히스이가 마루 끝에서 일어섰다. 발소리는 여전히 나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인 만큼 실만 내 손목 쪽으로 출렁였다.
"서두르지도 않고 늦추지도 않고, 한 단에 한 걸음씩. 못 박는 집안은 걸음도 못 박듯 걷는구나."
히스이가 실 끝을 감은 손가락을 들어 계단 쪽을 가리켰다.
"저건 네 쪽 사람이다, 무녀. 너희끼리 하는 마중이니, 나는 여기서 보마."
나는 배전 앞을 지나 돌계단 맨 위 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거기 섰다. 내려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등 뒤에서 실이 한 번 팽팽해졌다가 풀렸다.
"마중은 아니구나. 그렇다고 내 뒤도 아니고."
목소리에 처음 듣는 결이 섞여 있었다. 비웃음이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새벽빛이 도리이 언덕을 타고 올라왔다. 그 빛 속에서 그림자가 사람이 되었다.
여자였다. 검은 하카마 위에 짙은 양장 외투를 걸쳤고,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렸다. 허리띠에 무명 꾸러미 하나와 작은 쇠망치가 매달려 있었다. 짤그랑 소리는 그 꾸러미에서 났다. 찬 새벽 공기에 먹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여자는 내가 선 맨 위 단에서 두 단 아래에 멈추더니 허리를 숙였다. 자로 잰 듯한 인사였다.
"무녀님. 시라누이 아즈사입니다."
마을 제사 때마다 맨 앞줄 한가운데 앉던 얼굴이었다. 그 집 맏딸.
"…아즈사 님."
아즈사 님이 외투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펼치지도 않고 읽었다. 이미 외워 둔 줄이었다.
"산 위 여우 신사, 사(社) 하나. 무녀 아야메. 열아홉. 어젯밤 해시, 배전 기둥에 결박.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해시면 산 아래 전등이 하나씩 켜지던 시각이다. 나는 그때 기둥에 묶인 채 그 불을 세고 있었다.
수첩이 닫혔다.
"살아 계시는군요. 한 줄 고쳐야겠습니다."
아야메. 그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등 뒤의 실이 아주 작게 떨렸다. 바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히스이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즈사 님의 눈이 내 오른쪽 손목으로 내려가 오래 머물렀다.
"세 바퀴군요."
그러고는 턱을 조금 들고 내 어깨 너머를 보았다. 배전 앞, 히스이가 선 자리를. 정확히.
나는 숨을 삼켰다. 히스이가 나 말고 다른 누구의 눈에 보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보입니다. 봉인 가문은 닫은 것을 보는 눈을 물려받습니다."
등 뒤에서 히스이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발소리 없이, 꼬리 끝이 재를 쓰는 소리만. 히스이는 내 바로 뒤, 한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숨결이 내 정수리 위로 지나갔다. 차가웠다. 맨손으로 퍼내던 새벽 수반의 물처럼.
"그 턱."
아즈사 님을 내려다보는 목소리였다.
"천 년 전에도 그 턱이었다. 못을 쥐기 전에 턱부터 드는 버릇. 목은 가늘어졌고. 천 년 굶은 것 앞에서 턱을 들면, 그 아래가 다 보이느니."
숨결이 한 번 길게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냄새를 맡는 숨이었다.
그 말은 아즈사 님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숨은 내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굶은 것 앞에 목을 내놓고 오래 앉아 있지 말라던 어젯밤 목소리가 떠올랐다. 머리카락에 덮인 내 목덜미가 저 혼자 서늘해졌다. 굶은 것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즈사 님만이 아니었다.
아즈사 님은 히스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보인다고 해 놓고, 나만 보았다.
"무녀님, 비켜 주십시오. 풀린 것은 닫습니다."
귀 옆을 지나던 찬 숨이 거기서 멈췄다.
히스이는 아즈사 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숨을 멈춘 채, 내 발이 움직이는지를 듣고 있었다. 아즈사 님보다 먼저.
"비킬 테냐, 무녀."
내 귀 바로 옆에서 나온 말이었다. 낮았다.
"비키든가. 너희 쪽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히스이는 한 박자를 더 기다렸다. 그러고는 아즈사 님에게로 목소리를 돌렸다.
"나를 두고 무녀에게 말하는구나. 시라누이는 천 년째 그리하느니. 신은 물건처럼 건너뛰고, 사람한테만 말을 걸지."
아즈사 님이 한 단 올라섰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한 단뿐이었다.
"무녀님. 몇 대째 그랬는지 말씀드릴까요."
머리 위의 숨이 다시 멎었다. 이번에는 오래.
저 수첩 어딘가에, 나보다 먼저 이 계단에 섰던 무녀들이 숫자로 적혀 있을 것이다. 어젯밤 마루 밑에서 저분을 다시 가두지 말아 달라고 빌던 그 목소리도, 저 숫자 가운데 하나일까.
다리가 떨렸다. 입이 먼저 열렸다.
"…삼가, 아룁니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이 사의 무녀는, 저입니다."
아즈사 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비키지 않았다.
등 뒤가 조용했다. 한 박자, 두 박자. 그리고 실이 당겨졌다. 아주 가볍게.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었다. 내가 아직 거기 서 있는지 손끝으로 짚어 보는 힘이었다.
딸랑.
"…느껴지지."
늦은 대답이었다. 내 말에 대한 대답인지, 아즈사 님의 말에 대한 대답인지도 알 수 없었다. 숨이 반쯤 섞인 목소리는 아까보다 낮았다.
손목이요, 하는 대답이 입에 붙어 있었다.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등 뒤에서 숨 한 번이 들어갔다. 무슨 말이 따라 나올 것 같은 숨이었다. 나오지 않았다. 방울도 다시 울리지 않았다.
"무녀가 신 앞을 막는다라."
한참 만에 히스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천 년 동안 너희가 내 앞에 세운 건 못이었다. 사람이 선 건 처음 보는구나."
그 말이 끝날 때 눈앞에 장부가 펼쳐졌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 종이였다. 새벽에 물 번지듯 겨우 적혔던 '신사의 숨, 하나'가 마른 먹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비질도 봉납도 하지 않았다. 계단 맨 위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도 내놓은 것이로구나."
히스이가 낮게 말했다. 내 손목에 감긴 실은 그 말이 끝나도록 느슨해지지 않았다.
아즈사 님이 수첩을 외투 안에 넣었다.
"그러시면 오늘은 닫지 않겠습니다. 표시만 해 두겠습니다."
아즈사 님은 나를 밀지 않았다. 계단 옆 이끼 낀 비탈로 한 걸음 비켜 오르더니, 내 옆을 돌아 경내로 들어섰다. 내가 막은 것은 계단 하나였지, 산이 아니었다.
"아즈사 님."
아즈사 님은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등으로 받으며 곧장 배전으로 걸어갔다. 히스이 곁을 지날 때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히스이의 꼬리 끝이 그 외투 자락을 따라 한 번 움찔했다.
아즈사 님이 멈춘 곳은 배전 앞 기둥이었다. 어젯밤 내가 묶여 있던 기둥. 끊어진 짚 밧줄이 아직 그 발치 재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꾸러미가 풀렸다. 무명 속에서 손가락만 한 쇠못이 나왔다. 검은 몸에 끝만 희게 벼려져 있었다. 못대가리에는 붉은 먹으로 쓴 글자가 한 줄 둘려 있었다. 어젯밤 히스이의 옷깃 아래에서 언뜻 본 글자 자국과 같은 빛깔이었다.
"멈추거라."
히스이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 명령이 나 아닌 사람을 향했다.
말보다 꼬리가 먼저 갔다. 횃불 같은 붉은 꼬리 끝이 경내를 가로질러 아즈사 님의 목덜미 한 뼘 앞까지 날아갔다. 천 년 전이었다면 거기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둥 앞에서 그 붉은 것이 풀렸다. 물에 갠 먹처럼 흐려지더니, 아즈사 님의 옷깃 하나 흔들지 못하고 흩어졌다.
아즈사 님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기둥에 손대면, 너희 집 이름부터 셈하느니."
"셈은 저희 집이 합니다."
아즈사 님이 못 끝을 기둥에 댔다. 망치가 올라갔다.
탕.
그 소리는 나무에 박힌 게 아니었다. 내 뼈에 박혔다. 오른쪽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찌릿한 것이 거꾸로 타고 올라왔다. 실을 타고 온 것이었다.
장부가 다시 펼쳐졌다. 방금 굳었던 '하나'가, 마른 글씨에 물이 떨어진 것처럼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신사의 숨이 못 구멍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 빈자리로 다른 것이 들어왔다.
등 뒤에서였다. 발소리는 없었다. 꼬리가 재를 쓰는 소리도 없었다. 다만 찬 숨이 정수리를 지나 아래로 내려왔다. 머리카락에 덮인 내 목덜미 바로 위에서 멎었다. 배전 문이 처음 열린 밤, 값을 매기던 눈이 머물렀던 그 자리였다.
숨이 한 번 들어갔다. 길게. 냄새를 맡는 숨이었다. 코끝이 머리카락 몇 올을 밀어낼 만큼 가까웠다. 살에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들렸다. 침 삼키는 소리. 입술이 벌어지는 소리. 송곳니 끝이 서로 스치는, 아주 작은 소리.
실이 당겨졌다. 앞이 아니라 뒤로. 내 발꿈치가 돌바닥을 한 뼘 미끄러졌다. 그녀 쪽으로. 그녀의 손은 끝내 나에게 닿지 않았다. 실만이 나를 끌었다.
"지금 너를 삼키면."
목소리는 평평했다. 낮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날씨를 말하듯 했다.
"이 손가락은 돌아온다. 저 못쯤은 웃으며 뽑지."
나는 그제야 몸으로 알았다. 잡아먹지는 않겠다는 말을 들은 지 하룻밤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수반을 비우고, 빗을 바치고,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나는 아직 먹이였다.
다리가 굳었다. 숨을 참았다. 목을 움츠리지도 못했다. 움츠리면 거기 무엇이 있는지 들킬 것 같았다. 이미 다 들킨 자리인데도.
숨결이 거기 머물렀다. 한 박자. 두 박자.
더 오지 않았다.
송곳니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게.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둥 앞에서 아즈사 님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망치를 든 채로. 얼굴에는 놀란 빛이 없었다.
"보셨습니까, 무녀님."
자로 잰 목소리였다.
"굶은 신 곁에 남은 무녀가 사람으로 산을 내려온 일은, 저희 집 기록에 한 줄도 없습니다. 그 까닭이 방금 그것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통계입니다."
등 뒤에서 실이 풀렸다. 한 뼘. 끌려온 만큼, 꼭 그만큼만 도로 내주었다.
아즈사 님의 눈이 제 왼쪽 손목으로 내려갔다. 소매 끝에 부적 한 장이 매달려 있을 뿐, 아무것도 감기지 않은 손목이었다.
"그 실은 무녀님 손목이 아니어도 감깁니다. 못 쥐는 손목에도요."
못을 쥔 손이 저 실 끝을 쥐면 어떻게 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시라누이 댁은 천 년 동안 그 신을 문 안에 두었다. 이번에는 실 끝에 둘 것이다. 목줄처럼.
내 손목에서 실이 한 번 굳었다. 쇠처럼.
"시라누이 손목에 감길 바엔, 이 손가락째 굶느니."
나는 돌아보았다.
히스이는 한 걸음 물러나 서 있었다. 얼굴은 아무렇지 않았다. 등불을 삼킨 눈도 그대로였다. 옷깃이 비껴난 틈으로 붉은 글자 자국이 보였다. 어젯밤보다 한 마디쯤 아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실 끝을 감은 손. 그 손가락이 끝에서부터 비어 가고 있었다. 마디 하나가 사라진 자리로 새벽빛이 그대로 지나갔다. 이번에는 소매 속으로 거두지 않았다. 거둘 수가 없었다. 그 손가락에 실이 감겨 있었으니까.
다 풀리고 나면, 불러도 대답할 자리가 없다. 어릴 적 들은 말 한 줄이 그 빈자리로 지나갔다.
히스이가 내 눈길을 알아챘다.
"고개 돌리거라."
어젯밤에는 고개를 들라던 목소리였다. 나는 돌리지 않았다.
빈 손가락에서 실이 한 마디 미끄러졌다.
손목에 걸린 실의 무게가 달라졌다. 가벼워졌다. 히스이가 놓으려는 게 아니었다. 실을 쥐고 있을 만큼 손가락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조금 전 나를 한 뼘 끌어당기던 그 손이었다.
내 왼손이 먼저 움찔했다. 실 쪽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숨이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저 손가락이 다 없어지면.
그다음은 생각이 되지 않았다.
못은 반쯤 박혀 있었다. 아즈사 님이 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다. 새벽빛이 그 쇠머리에 희게 걸렸다.
"표시는 이것으로 됩니다. 한 번 더 치면 끝까지 들어갑니다."
아즈사 님은 나도 히스이도 보지 않았다. 기둥만 보았다.
"그때 무녀님이 어느 쪽에 서시는지, 그것도 적어 두겠습니다."
히스이가 나를 보았다. 아즈사 님이 아니라, 나를. 그 손끝에서 붉은 실이 또 한 마디 빠져나왔다.
"…무녀."
떨림 없는 목소리였다. 남은 손가락만 떨고 있었다.
"실 쥐거라."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