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온 인사
쿵.
다섯.
나는 여섯을 기다렸다. 여섯은 오지 않았다. 망치는 거기서 쉬었다.
마당이 조용해지자 냄새가 올라왔다. 창 하나 없는 이 돌방까지 갓 켠 나무의 생 냄새가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화형대가 오늘 한 단 올라갔다.
"형씨, 아까 그거 셌어?"
벽 너머에서 이보가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높았다.
"다섯."
"난 넷에서 놓쳤어. 세다가 졸았어. 웃기지, 그게." 그가 킥킥 웃었다. 웃음이 조금 길게 가다가 뚝 끊겼다. "…누구 건지 알아?"
"아무도 안 가르쳐 주더라."
"그치. 그러니까 머리 쓰지 마, 형씨. 통한 걸 우려먹어. 나 봐. 같은 거 오늘 밤이면 네 번째야." 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더, 또 한 번. "…멀쩡하잖아. 그치?"
대답을 기다리는 두드림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고해를 두 번 올린 줄들은 하나같이 끝이 '못 믿겠음'이었다. 그런데 이보는 아직 살아 있다.
눈을 감자 어제 그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건 고해가 아니라 인사군.' 그는 내가 빌려 온 고해의 주인을 날짜와 층수까지 짚었다. 기록을 전부 외워 두고 맞춰 보는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듣는 사람일까.
그래서 칠 년 전 누군가의 고해를 골랐다. 그때 그는 아직 심문관 옷을 입기 전이었다. 뼈만 남기고 전부 갈아입혔다. 인장 구멍까지 막았다.
오후에 망치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세지 않았다. 세다 보면 대사를 놓친다.
밤이 왔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둘 올라왔다. 하나는 고르게 끊어 디뎠고, 하나는 종종걸음이었다. 의자 다리가 돌바닥을 긁었고, 격자 너머에 촛불이 켜졌다. 밤공기에 섞여 잉크 냄새가 건너왔다. 그가 앉으면 늘 나는 냄새였다.
오늘은 촛대가 올라오지 않았다. 규정대로 손 높이에서 멈춰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잠겼다. 이상했다. 어제는 그 불이 너무 높아서 불편했는데, 오늘은 낮아서 불편했다.
"삼층 격자, 신탁 모독 혐의, 극작가 가스파르." 구석에서 필경사 토마스가 기록 머리를 읽었다. "아흔두 번째 밤."
"토마스." 다미안이 말했다. "오늘은 하나도 빼지 말고 적어라. 고해자의 답도, 내 질문도."
"…전부 말입니까."
"전부."
어제는 적지 말라던 사람이었다. 토마스가 펜 끝을 잉크병 가장자리에 탁, 탁 털었다. 나는 어젯밤 계단을 타고 올라오던 늙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잣대를 따지던 목소리였다.
"오늘은 잣대를 하나만 쓰시겠다는 거군요, 심문관님."
한 박자.
"들었나."
"이 탑 계단은 소리를 위로 잘 올려 보냅니다. 극장 지어 본 사람이 설계했나 봅니다."
"그럼 알겠군." 그가 펜을 잉크에 적셨다. "오늘은 판례가 잰다. 전례에 통한 죄면 통하고, 전례에 없는 죄면 묻는다. 나는 받아 적기만 한다."
"판례라면 제가 좀 압니다."
"알지." 펜 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병 속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귀찮다."
나는 웃음을 삼켰다. 삼킨 웃음이 목 안쪽에서 한참 간질거렸다. 저린 무릎도 잊을 만큼.
"…들어 보지. 오늘 밤의 죄를 대."
나는 막을 올렸다.
"작년 봄, 우리 극단 개막 열흘 전이었습니다."
리듬은 어제보다 반 박자 느리게 잡았다. 너무 매끄러우면 외운 티가 난다.
"전단에 개막 날짜를 찍어야 했습니다. 날을 고르려면 별력을 봐야 하지요. 그래서 예배당에서 필사본을 한 권 빌렸습니다. 그런데 펼쳐 보니 저희가 잡아 둔 날이 흉일이더군요. 까마귀별이 저울자리에 걸리는 날이었습니다.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극장 세가 붙어 있었으니까요."
사각, 사각. 그의 펜이 고르게 종이를 긁었다.
"그래서 분장실 촛불 아래에서 별 하나를 옆 칸으로 옮겨 그렸습니다. 까마귀별을 저울자리에서 한 칸 밖으로요. 그러자 흉일이 그냥 평일이 됐습니다. 신께서 정하신 하늘을 제 손으로 고친 겁니다."
마지막에 숨을 한 번 쉬었다.
"…용서를 빕니다."
구석에서 토마스의 펜도 따라 긁었다. 두 펜이 어제와 똑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언제."
"작년 춘분 지나고 엿새째 밤입니다. 개막이 춘분 지나고 열엿새째였으니, 꼭 열흘 전이지요."
"그때 극장은."
"열려 있었습니다. 봄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습니다."
사각.
"어디서."
"극장 이층 분장실입니다." 그리고 혀가 한 줄을 더 얹었다. "분장실 문은 안에서 잠그지 않습니다. 배우들이 옷 갈아입다가도 뛰쳐나가야 하니까요."
대본에 없던 줄이었다. 괜찮다. 군더더기 한 줄은 오히려 진짜처럼 들린다.
사각. 그 줄에서만 펜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누구와."
"혼자였습니다. 빌린 것도 저고 돌려준 것도 저입니다. 아무에게도 펼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각, 사각. 어제는 질문마다 내 대답이 비틀거렸다. 오늘은 펜이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별력 필사본에는 예배당 인장이 찍힌다." 세 마디가 끝났는데도 그는 입을 닫지 않았다. "인장 위에 덧그리면 잉크가 번진다. 책을 돌려받은 서기가 못 알아봤을 리 없다."
왔다. 하루 종일 기다린 질문이었다.
"인장이 찍히기 전에 빌렸습니다. 필사가 막 끝난 책이라, 인장은 제가 돌려준 다음 날 찍혔지요. 그래서 아무도 몰랐습니다."
펜이 그 대답을 따라 적었다.
"…맞다. 인장 찍기 전이라면."
나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걸 알아본다면—
펜이 서판 위에 눕혀졌다. 소리 없이. 어제는 들으라고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던 펜이었다. 소리가 없는 쪽이 더 무서웠다.
"구멍이 없군." 그가 말했다. "언제도, 어디서도, 누구와도. 인장까지 막아 놨다. 석 달 동안 들은 고해 중에 제일 잘 짜였다."
어제는 제일 서툴다고 했다. 오늘은 제일 잘 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촛대가 올라왔다.
손 높이에서 천천히, 내 눈높이까지. 판례가 잰다던 사람의 손이었다. 오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격자와 그의 얼굴 사이가 한 뼘으로 줄었다. 촛불의 열기가 먼저 건너왔고, 그다음에 숨이 건너왔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람의 숨이었다. 석 달 동안 이 격자 너머에는 목소리만 있었다. 그 너머에 숨이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만큼 가까우니 그것도 보였다. 왼쪽 눈가에 번진 금빛. 어제는 촛불이 거기 걸린 줄 알았다. 촛불은 지금 그의 턱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을 받아 빛나는 게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게, 거기서 먼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니, 내 입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말랐다. 축이면 그가 볼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한 박자.
"그게 정말 고해자 자신의 말인가."
목소리가 낮았다. 한 뼘 거리에서 나온 그 낮은 소리는 귀를 지나가지 않고 귓바퀴에 걸려 남았다. 무릎 위에서 손가락이 굳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심문관님."
"입은 고해자 거지." 그가 말했다. "말은 아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석 달 동안 고해자의 죄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광대, 소품장이, 무대 일꾼. 어제는 일꾼 하나 이름 짓는 데 숨을 한 번 썼지. 펠릭스." 그 이름을 그는 어제 들은 그대로 돌려줬다. "오늘은 별 이름을 둘이나 대면서 숨 한 번 안 쉬었다. 그런데 그 개막 날 무대에 누가 섰는지는 한 마디도 없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별은 외웠고 사람은 넣지 않았다. 빌려 온 뼈에는 무대가 없었다.
석 달. 이 사람은 내가 지어낸 광대와 일꾼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명치 아래가 이상하게 더워졌다. 겁이 날 때 조여드는 자리와는 다른 곳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가 서판 위 글줄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손끝이 내 고해를 한 줄씩 짚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게 이런 감각인 줄은 몰랐다. "오래 앉아서 무언가를 베끼던 사람의 말이다. 날짜부터 세고, 미안하다는 말은 맨 끝에 한 번만 붙이는 사람."
필사공.
나는 오늘 밤 그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눈꺼풀 안쪽에서 잉크 줄이 저절로 풀렸다. 칠 년 전 봄, 일층. 딸의 혼삿날이 흉일에 걸리자 예배당 별력의 별 하나를 옆 칸으로 옮겨 그린 필사공. 내가 뼈를 빌려 온 고해의 주인이었다. 그 줄의 맨 끝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용서를 빕니다.'
나는 그 한 마디까지 빌려 왔던 거다.
"고해자는." 그가 덧붙였다. "미안할 때 농담부터 하지."
그 말은 늦게 닿았다. 석 달 동안 이 사람은 내 죄를 받아 적은 게 아니었다. 나를 받아 적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아시는 모양입니다."
"규정에 없는 질문이다."
"심문관님이 먼저 규정에 없는 걸 들으셨으니까요."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그의 숨이 거기 섞여 있었다.
"…그렇군." 그가 말했다. "어디서 빌려 왔는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남의 말이라는 건 들린다."
그가 모른다고 말하는 동안 불꽃이 그의 숨에 한 번 더 기울었다. 나는 그 불이 다시 똑바로 설 때까지 숨을 쉬지 못했다.
"어제는 남이 써먹은 인사를 들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아주 얇게 날이 서 있었다. 화가 나면 더 조용해지는 사람인데, 오늘은 말이 하나 많았다. "오늘은 공들여서 다림질까지 한 인사군. 고해자는 왜 자기 말을 안 하지."
"제 말이 좀 비싸서요, 심문관님. 아껴 씁니다."
"비싼 걸 아끼다가 값을 못 치르는 사람이 있다." 그가 몸을 물리고 촛대를 내렸다. 내 눈높이에서 손 높이로. 한 뼘이던 거리가 도로 격자 하나만큼 멀어졌다. "이 탑에 많지."
그가 펜을 다시 들었다.
"판례대로면 통과다. 구멍이 없으니까." 펜 끝이 잉크에 잠겼다 나왔다. "그런데 이 자리는 고해자의 죄를 적는 자리다. 남의 죄를 고해자 이름 밑에 적을 수는 없다."
구석에서 토마스의 펜이 멎었다. 토마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심문관님. 지금 그 말씀은 기록에 남습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번 달 들어 판례를 벗어난 판정이… 이걸로 세 번째가 됩니다."
"그것도 적어라."
어젯밤 계단 아래에서 안경알 문지르던 소리가 귀에 되살아났다. '판정을 세 번 그르친 심문관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테지.' 그는 '압니다'라고 대답했었다. 알면서, 지금 내 이름 밑에 자기 목을 올려놓고 있었다.
"다시 대겠습니다." 말이 먼저 나갔다. "이번엔 제 걸로요. 지금 바로—"
"고해자 것은 어디 있지."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석 달 동안 한 줄 들었다. 어제. 그것도 이막 광대의 입을 빌린 거였지."
초 한 자루가 별자리보다 크다. 내가 쓴 대사였다. 그러니까 내 말이었다. 다만 광대의 입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버릇처럼 늘 하던 말이 혀끝에 올라왔다.
"그건 그렇고—"
그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극작가 입에서 다음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석 달 동안 겁이 날 때마다 나를 받쳐 주던 농담이 그 자리에서 뚝 끊겼다.
사각.
한 획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짧은 획. '못 믿겠음'의 첫 획이었다. 석 달 동안 나는 그 획을 남의 서판에서만 봤다. 잉크 줄 끝에서, 다음 줄이 없는 기록들 끝에서.
그리고 펜이 멈췄다. 펜 끝이 첫 획 끝에 박힌 채 서 있었다. 토마스의 펜도 따라 멈췄다. 심지 타는 소리만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펜도 들지 않았다.
"…고해자."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왔다. 판결문을 읽던 높이가 아니었다. 더 낮았다. 고개를 숙인 채라 그 소리는 서판에 한 번 닿았다가 격자 사이로 기어 올라왔다.
"방금 그 고해에, 고해자 자신의 말은…"
숨 한 번.
"한 줄도 없었나."
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내 귀에 너무 크게 들렸다.
내 말은 딱 한 줄 있었다. 어젯밤 잊었다고 거짓말한 줄. 《별을 받아 적는 사람》 마지막 장에서 신탁이 하는 대사. 그가 적지 말라며 거둔 질문의 답이었다. 그 줄이 혀끝까지 올라와 앞니 뒤에 걸렸다. 입술을 열면 굴러 나갈 것 같아서 나는 이를 물었다.
마당의 나무 냄새가 아직 방 안에 남아 있었다. 어젯밤 내가 누구 거냐고 물었던 그 나무.
그리고 석 달 만에 처음으로, 격자 너머의 그 사람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