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죄
한 획.
위에서 아래로 내려그은 그 짧은 획 옆에 나머지가 붙으면 '못 믿겠음'이 된다. 그러면 내일 새벽 나는 마당의 그 나무 위에 선다. 오늘 새벽 내가 다섯까지 센 그 나무다.
붙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석 달 동안 잉크 줄로 남의 서판을 수백 장 넘겨 봤다. 그래도 판정이 반쯤 적힌 채 끝난 서판은 한 장도 없었다.
격자 너머의 그 사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숙인 채로 한 번 더 물었다.
"한 줄도 없었나. 고해자 자신의 말은."
없었다고 하면 끝이다. 있었다고 하면 그게 뭐냐고 물을 거다. 그런데 석 달 동안 그가 물을 때마다 나는 남의 것을 내밀었다.
입안이 말랐다. 혀로 이를 한 번 쓸었다. 극작가 머릿속에는 늘 다음 대사가 서 있다. 오늘은 없었다. 대신 아까 내 입에서 먼저 굴러 나간 한 줄이 떠올랐다. 대본에 없던 그 줄. 그 줄에서만 그의 펜이 반 박자 늦게 따라왔었다.
"…한 줄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무대 위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장실 문은 안에서 안 잠근다는 그 줄이요.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다가도 뛰쳐나가야 하니까요. 그건 대본에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펜 끝이 종이에서 아주 조금 떴다.
"알고 있다." 그가 말했다. "그 줄에서 고해자의 숨이 바뀌었다."
숨. 그는 내 말이 아니라 내 숨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 줄이다." 목소리가 다시 판결문을 읽는 높이로 돌아갔다. "한 줄로는 하루를 못 산다. 이 탑에서는 아무도."
그런데 그 문은 내 문이었다.
열세 살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서부터 드나든 문이다. 경첩은 늘 왼쪽 위에서 삐걱댔고, 문틀 아래에는 누가 흘린 아교가 호박색으로 굳어 있었다. 남의 고해에는 그런 게 없다. 아까 빌려 온 칠 년 전 필사공의 줄에는 별 이름은 있어도 경첩 소리는 없었다.
"그럼 그 문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심문관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촛불은 손 높이 그대로였다. 그늘 속에서 눈만 올라왔다.
"다시 대라는 말은 안 했다."
"압니다. 그래서 여쭙는 겁니다." 나는 무릎을 고쳐 꿇었다. 돌바닥의 냉기가 정강이를 타고 올라왔다. "오늘 밤 고해를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판례에서 한 줄도 꺼내지 않겠습니다. 뼈도 살도 제 것으로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남의 말로 들리시면, 그 획 옆에 나머지를 붙이십시오."
구석에서 토마스의 숨소리가 멎었다. 필경사는 펜을 든 채, 다미안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판례에서 한 줄도 안 꺼낸다." 그가 내 말을 그대로 되짚었다. "그 말도 기록에 남는다. 못 지키면 그것도 남는다."
"남기십시오."
긴 정적이 흘렀다. 마당에서 바람이 들어와 촛불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섰다. 갓 켠 나무 냄새가 아직 벽에 배어 있었다.
"…판정은 한 번이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고해가 둘이면 둘을 합쳐서 잰다. 첫째가 남의 것이었다는 건 이미 적혔다. 둘째가 그걸 덮어야 한다. 못 덮으면, 이 획 옆에 나머지가 붙는다."
그는 펜을 획 끝에서 떼어 잉크병 옆에 두었다. 언제든 다시 쥘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턱 끝으로 격자를 한 번 가리켰다.
"…대."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석 달 내내 고해 전에는 눈을 감았다. 잉크 줄을 불러내려고. 오늘은 부르지 않았다. 불러 봐야 남의 줄이고, 이 사람은 그걸 듣는다.
대신 냄새를 떠올렸다.
아교. 분칠할 때 쓰는 쌀가루. 밀랍 초가 녹아 무대 바닥 틈에 스민 냄새. 막 뒤 밧줄에서 나는 삼 냄새. 객석 맨 뒷줄에서는 늘 양파 냄새가 났다. 시장 상인들이 장사를 마치고 와서 앉는 자리였으니까.
거기가 내 땅이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고해에 올린 적 없는 땅.
"지난겨울 끝물이었습니다."
리듬은 잡지 않았다. 잡을 필요가 없었다. 무대는 외우는 데가 아니라 걸어 다니는 데니까.
"겨울 공연 《빌린 외투》 마지막 주였습니다. 남의 외투를 빌려 입은 광대가 주인 행세를 하다가 사흘 만에 들통나는 이야기지요. 광대는 오도라는 친구가 맡았습니다. 키는 작고 목소리는 커서, 객석 맨 뒷줄까지 침이 튀는 배우입니다."
사각. 펜이 다시 움직였다. 그가 언제 펜을 도로 쥐었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마지막 주에 오도의 외투가 찢어졌습니다. 셋째 막에서 무대 끝 계단을 굴러 내려가야 하는데, 그날 계단에 못 하나가 솟아 있었던 겁니다. 등판이 손바닥 두 개만큼 갈라졌습니다. 의상을 맡은 베르타 할멈이 밤새 꿰매겠다고 나섰는데, 바늘에 실 꿰는 데만 초 한 자루를 다 태웠습니다."
"초 한 자루를."
그가 되받았다. 펜은 그 말을 적지 않았다.
초 한 자루가 별자리보다 크다. 어젯밤 그가 들은 내 대사다. 그 사람은 그걸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네. 한 자루를요."
목이 한 번 메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다음 날 낮에 무대 일꾼 펠릭스가 예배당 뒤 세탁장 앞을 지나다가 빨랫줄에 걸린 걸 봤답니다.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흰 옷이었는데, 단에 금실이 둘러져 있었다고요. 대신관님들이 축일에 입는 제의였습니다."
펜이 한 번 걸렸다. 아주 짧게.
"펠릭스는 말만 전했습니다. 걷어 온 건 접니다. 해 질 녘에 빈 빨래 바구니를 들고 갔습니다. 바구니를 든 사람은 아무도 안 쳐다보거든요. 무대에서 배운 겁니다. 소품 하나면 누구든 될 수 있지요."
펜이 멎었다. 그의 엄지가 펜대를 반 바퀴 굴렸다가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누구든."
낮은 소리였다. 나한테 묻는 말도 아니었고 토마스더러 적으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 대목에서 토마스의 펜만 빨라졌다.
"그날 밤 오도는 대신관의 제의를 입고 셋째 막에 섰습니다. 금실 단에 불빛이 걸리자 객석 맨 뒷줄에서 누가 먼저 웃었습니다. 양파 장수였을 겁니다. 그다음엔 극장 전체가 웃었습니다."
그의 고개가 촛불 쪽으로 반쯤 들렸다. 먼 데서 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처럼. 그늘 밖으로 나온 건 턱선과 입가뿐이었는데, 그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려 있었다.
"남의 외투를 빌려 입고 주인 행세를 하는 광대가, 하필이면 신탁을 받드는 분들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숨을 한 번 쉬었다. 이번에는 대본에 적어 둔 숨이 아니었다.
"막이 내린 뒤에 제 손으로 빨아서, 새벽에 그 빨랫줄에 도로 걸어 두었습니다. 그게 제 죄입니다. 성물을 훔쳐 광대에게 입혔고, 신탁을 받드는 옷으로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용서를 빈다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그건 필사공의 말이니까. 대신 하나를 덧붙였다.
"…오도가 그러더군요. 그 옷이 자기 외투보다 훨씬 따뜻하다고. 어쩌면 그게 제일 큰 죄겠지요."
사각, 사각. 두 펜이 나란히 긁었다. 그런데 박자가 맞지 않았다. 토마스의 펜이 앞서가고 그의 펜이 뒤따라왔다. 그가 받아 적는 속도가 내 말보다 느렸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나는 문항을 기다렸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언제."
"겨울 공연 마지막 주, 사흘째 밤입니다. 축일이 지나고 사흘째였습니다."
사각.
다음은 어디서다. 대답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세탁장 빨랫줄의 높이, 셋째 막 계단의 칸수, 분장실 경첩. 하루 만에 급히 메운 구멍이 아니라, 십 년 동안 저절로 메워진 자리였다.
어디서는 오지 않았다.
"그 광대." 그가 말했다.
"…오도요."
"웃겼나."
토마스의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머뭇거렸다. 그 말을 어느 칸에 적어야 하는지 모르는 손이었다.
"웃겼습니다. 그 친구는 넘어지기만 해도 웃깁니다. 무릎이 먼저 접히고 엉덩이는 나중에 떨어지거든요. 사람들은 그 반 박자 사이에서 웃습니다. 넘어지는 건 누구나 하지만, 웃기려면 늦게 넘어져야 합니다."
"…늦게."
그는 그걸 받아 적었다. 정말로 받아 적었다. 넘어지는 법을, 신탁 모독자의 고해 서판에.
"누구와."
"펠릭스가 봤고, 제가 걷었고, 오도가 입었습니다. 베르타 할멈은 모릅니다. 할멈은 이틀 밤을 꼬박 새워 그 외투를 끝내 다 꿰맸습니다. 오도가 제의를 입고 선 다음 날 아침에 들고 왔지요. 이제는 쓸 데가 없어진 외투를요."
"펠릭스." 그가 그 이름을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어젯밤 그 일꾼."
"네."
어젯밤 지어낸 죄에 빌려 넣은 진짜 이름을, 그는 오늘 밤에만 벌써 두 번 집어 올렸다.
사각. 그가 고개를 들었다.
"고해자는."
한 박자.
"그 막이 오르는 동안 어디 있었지."
어디서. 결국 그 문항이 왔다. 그런데 모양이 달랐다. 그는 죄가 일어난 자리를 묻지 않았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물었다.
"…무대 옆, 막 줄 뒤에요. 극작가는 자기 극을 객석에서 못 봅니다. 늘 배우들 등만 보지요. 사람들이 웃으면 그 웃음이 배우 등에 부딪혀서 막 뒤로 넘어옵니다. 저는 그걸로 압니다. 오늘 장면이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
"등으로."
"네. 등으로요."
그는 한동안 펜만 놀렸다. 무엇을 적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석 달 동안 고해자는 이 격자를 객석으로 썼다. 늘 앞을 보고, 늘 박수 칠 자리를 남겨 두고." 펜 끝이 종이를 긁었다. "오늘은 막 뒤에서 말하는군."
"막 뒤가 원래 제 자리입니다, 심문관님. 앞에 나가면 썩은 양파가 날아오거든요." 혀가 저 혼자 한 줄을 더 얹었다. "여기선 양파 대신 장작이 쌓이고요."
"고해 중이다."
세 마디. 판결문 높이였다. 웃을 자리를 칼같이 잘라 냈다.
"…압니다. 그러니까 농담이지요. 고해 중이 아니면 이렇게 열심히 웃길 일도 없습니다."
펜 끝이 종이를 한 번 긁고 섰다.
"겁날 때도 하는군."
받아 적는 소리였는지 말소리였는지 모를 만큼 낮았다. 미안할 때 농담부터 한다고 그가 말한 게 아까였다. 오늘 밤에만 한 칸이 더 늘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귓바퀴가 먼저 대답을 해 버린 것 같았다. 뜨거웠다.
"그럼 그 연극도." 그가 이었다. "마지막 장에서 신탁이 뭐라고 하는지, 고해자는 막 뒤에서 들었겠군."
어젯밤의 질문이었다. 그가 토마스에게 적지 말라며 지워 버린 바로 그 질문. 그는 그걸 버리지 않고 하루 내내 들고 있었다.
토마스의 펜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번엔 적어야 하느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그는 토마스를 보지 않았다.
"…그건 오늘 밤 고해가 아닙니다, 심문관님."
"알고 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질문을 거두지도 않았다.
"판례 목록." 그가 말했다.
토마스가 곁에 쌓아 둔 두꺼운 장부를 끌어당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한참 이어지다가 멎었다.
"…성물 절도는 있습니다. 제의를 무대에 올린 건… 없습니다, 심문관님."
"전례가 없군." 그가 펜 끝으로 서판 귀퉁이를 두 번 짚었다. "그럼 묻는다."
등이 서늘해졌다. 판례에 없는 죄는 판례가 지켜 주지 않는다.
"새벽에 도로 걸었다고 했지. 빤 옷은 젖어 있다. 전날까지 마르던 옷이 아침에 다시 젖어 있으면, 세탁장 수녀가 모를 리 없다."
정확한 자리에 바늘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외워 둔 구멍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날씨였다.
"그 주 내내 진눈깨비였습니다. 처마 밑 빨랫줄이라도 옷이 마를 수가 없었어요. 축일 다음 날 넌 제의가 사흘째 축축했습니다. 제가 걷어 간 밤에도, 도로 건 새벽에도 옷은 똑같이 젖어 있었고요. 수녀님 눈에는 사흘째 안 마르던 옷이 하루 더 안 마른 것뿐이었을 겁니다."
"…진눈깨비."
"극장 지붕이 새서 셋째 막 계단 옆에 양동이를 받쳐 둔 주라 기억합니다. 오도가 구른 계단 바로 옆이요. 못이 솟은 것도 그 물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무가 불었으니까요."
딱. 촛농이 떨어졌다.
그는 받아 적지 않았다. 펜을 든 채 나를 봤다. 그리고 촛대를 쥔 손이 올라왔다. 한 치. 손 높이에서 꼭 한 치만 올라와 멈췄다. 눈높이는 아니었다. 그 한 치를 따라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그늘이 그의 얼굴에서 한 뼘쯤 물러났다. 판례가 잰다던 밤에, 판례에 없는 한 치였다.
"양동이 소리는." 그가 말했다. "막이 오르는 동안에도 들리나."
"들립니다. 똑, 똑. 그래서 그 주에는 배우들한테 대사를 반 박자씩 늦추라고 했습니다. 물 떨어지는 사이에 대사를 넣으려고요." 말하다가 깨달았다. "…지금 이 방 촛농하고 박자가 비슷했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격자 아래로, 촛농이 굳어 가는 돌바닥 쪽으로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이 방에서는 늦출 필요 없다." 그가 말했다. "다 들린다."
구석에서 토마스의 펜이 멎었다. 토마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쪽을 보지 않은 채 이름만 불렀다.
"토마스."
펜이 다시 긁기 시작했다. 다 들린다. 그 말이 토마스의 펜 끝에서 한 글자씩 종이에 박혔다.
그가 펜을 잉크에 적셨다. 그리고 펜 끝을 아까 그 획 위에 댔다.
나는 숨을 멈췄다.
펜이 획 끝에서 꺾여 네모를 닫았다. 거기까지는 '못'과 같았다. 그런데 펜은 네모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 오른쪽에 세로획 하나를 곧게 세웠다.
'믿'이었다.
석 달 동안 잉크 줄 끝에서 그 획을 볼 때마다 나는 '못'만 읽었다. 같은 획에서 '믿'이 나올 수 있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토마스. 판정, 믿을 만함."
두 판정은 첫 획이 같았다.
토마스가 펜을 고쳐 쥐고 기록 머리부터 소리 내어 읽었다. "삼층 격자, 극작가 가스파르, 아흔두 번째 밤. 판정, 믿을 만함." 한 박자. "…사유는."
"첫째 고해는 구멍이 없었다. 남의 것이라서. 빌린 외투는 솔기가 안 보인다." 그가 서판에서 펜을 들었다. "둘째는 구멍이 있었다. 찔렀더니 진눈깨비가 막았다. 남의 동네 날씨는 빌려 올 수가 없다. 둘째는 고해자 말이다. 그대로 적어라."
토마스가 그대로 적었다. 그리고 펜을 든 채 한참 그 줄을 내려다봤다.
"…심문관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낮았다. "판례 없는 죄에 내린 판정입니다. 이번 달 들어… 이걸로 네 번째가 됩니다."
아까는 '그것도 적어라'라고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으로 펜촉을 훔쳤다.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토마스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대답이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야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네 번째. 그 석 자가 내 이름 밑에 적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무릎 위에서 굳어 있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넷 남아 있었다.
하루를 벌었다. 내일 새벽 망치 소리는 아직 내 몫이 아니다. 그 하루 값을 누가 치르는지는 방금 격자 저쪽 종이에 적혔다.
"…세 번이면 심사라고 들었습니다, 심문관님."
천이 펜촉 위에서 멈췄다. 그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석 달 동안 그는 내 말에 늘 무언가를 돌려줬다. 문항이든, 규정이든, 웃음기든. 이번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입이 버릇대로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심문관님."
아까는 거기서 끊겼던 말이다. 이번에는 다음 말이 따라 나왔다.
"어디서를 안 물으셨어요. 석 달 동안 한 번도 안 거르시던 건데."
천이 다시 움직였다.
"아까 그 분장실에는 고해자가 한 줄밖에 없었다. 문을 안에서 안 잠근다는 줄. 그 한 줄을 찾으려면 물어야 했다." 그가 펜촉을 한 번 더 훔쳤다. "오늘 그 극장은."
말이 거기서 끊겼다. 그는 천을 접어 서판 옆에 놓고 나서야 한 박자 늦게 이었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왜요."
"규정에 없는 질문이다."
아까 들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까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문을 닫는 말이 아니었다. 안에서 잠그지 않은 문이었다.
하루를 산 밤인데, 나는 내 하루 말고 그의 네 번째를 세고 있었다.
그가 일어섰다. 토마스가 서둘러 잉크병 마개를 닫았다.
"토마스. 오늘 기록은 내가 올린다. 아침에."
"…예, 심문관님." 토마스가 한 박자 머뭇거렸다. "그런데 이번 달 기록은 수석심문관님께서 직접 받으시겠다고…"
"내가 올린다."
같은 말이었다. 높이도 같았다.
토마스가 기록 장을 내밀었다. 내미는 손이 한 번 머뭇거렸다. 그는 그 장을 받아 잉크가 마른 데를 손끝으로 한 번 짚어 보더니, 두 번 접어 제복 앞섶 안에 넣었다. 앞섶을 여는 사이 옷깃이 한 번 벌어졌다. 쇄골 언저리에 촛불을 받고도 데워지지 않는 하얀 것이 비쳤다가 옷깃 아래로 도로 숨었다.
네 번째가 적힌 종이가 그의 가슴께로 들어갔다. 석 달 동안 기록은 늘 토마스가 안고 내려갔다.
그가 촛대를 든 채 돌아섰다. 불빛이 격자에서 멀어졌다. 발소리 둘이 계단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이 먼저 나선을 따라 내려갔다. 고르게 끊어 딛던 발소리는 계단 첫 칸에서 멎었다. 격자 그림자가 내 무릎 위로 길게 늘어났다.
그때 마당에서 소리가 났다.
쿵.
밤이었다. 마당에 일꾼이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입이 먼저 수를 찾았다. 새벽에는 다섯까지 셌다. 오후 것은 세지 않았다. 그러니 이게 몇 번째인지, 나는 모른다.
계단의 발소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들은 거다.
"…내일은 다른 무대로 지어 와."
한 박자. 극장에서라면 막 줄을 잡은 손이 내려오기 직전의 그 한 박자.
"들어 보지."
발소리가 나선을 따라 내려갔다. 불빛이 벽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사라졌다.
벽은 조용했다.
심문관이 내려가고 나면 늘 벽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형씨, 자? 오늘 거 먹혔어? 오늘 밤은 그 소리가 오지 않았다. 손등으로 돌벽을 두 번 두드렸다.
"…이보."
대답 대신 마당 쪽에서 바람이 들어와 갓 켠 나무 냄새를 한 번 더 부려 놓았다. 같은 거 오늘 밤이면 네 번째야. 오늘 아침 벽 너머에서 그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멀쩡하잖아, 그치?
나는 그 물음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오늘 밤 내 고해가 처음부터 다시 돌았다. 이번에는 막 뒤가 아니라 객석에서.
제의는 없었다.
세탁장 빨랫줄도, 해 질 녘의 빈 바구니도 없었다. 오도의 외투는 정말 그 겨울에 찢어졌고, 베르타 할멈은 정말 초 한 자루를 태웠다. 진눈깨비도, 지붕 새던 양동이도 진짜였다. 그날 밤 오도가 입고 선 건 할멈이 덧대다 만 외투였다. 거짓은 한 벌뿐이었다. 그 한 벌을 나는 내 극장 한가운데에 걸었고, 그 한 벌 밑에 그의 네 번째가 적혔다.
금실 두른 흰 옷. 그 말 위에서 그의 펜이 한 번 걸렸었다.
그런데 그는 '지어 와'라고 했다.
숨이 목에 걸렸다. 아무도 없는 어둠 속인데, 귀 끝이 뜨거웠다.
3화 끝




